분명 하루를 열심히 살아냈는데, 밤에 자려고 누우면 허무해졌다.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남는 것이 없는 기분이었다. 육아와 집안일은 그렇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
통역 일을 할 때는 달랐다. 열심히 하면 그에 따른 보상이 있었다. 요율이 오르거나, 소개가 이어지거나, 스케줄이 바빠졌다. 나는 늘 그런 가시적인 지표로 나의 가치를 확인해 왔다. 사회적으로 이만큼의 경제 활동을 하고 있고, 그만큼의 대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살아 있게 만들었다.
반면 육아와 집안일은 아무리 애써도 만져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무엇인가를 했는데, 내가 무엇을 했는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감각은 생각보다 폭력적이었다. 방향이 맞다는 말로는 이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라는 조언도 맞는 말이었지만, 밤이 되면 생각은 더 많아졌고 잠은 오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해야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는 시간을 나에게 쓰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기다리는 대신, 시간을 만들기로 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침대에 누워 상념에 빠지기보다 거실로 나왔다. 언젠가 사두었던 책들을 꺼내 읽었다. 두껍든 얇든, 당장 나에게 답을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책들 중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철학책이었다. 알랭 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 에픽테토스의 『어떻게 자유로워질 것인가』. 그 책들은 내게 말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불안과 질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감정이라고. 이 감정이 특별한 실패도, 나만의 결함도 아니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나는 더 알고 싶어졌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드는지, 무엇이 나를 다시 단단하게 만드는지. 특히 인간의 감성과 아름다움을 다루는 미학이 궁금해졌다. 미술관에서 어떤 작품이 나를 위로하는지, 왜 그 앞에서 오래 서 있게 되는지 알고 싶어졌다.
이 생각은 자연스럽게 내 딸에게로 이어졌다. 언젠가 아이가 자라 같은 시간을 지나게 될 때, 나는 어떤 어른으로 옆에 서 있고 싶은 걸까. 나는 그녀가 자신을 잃지 않는 어른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먼저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하던 대로, 계속 공부하기로 했다. 배움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다. 더 많이 이해하고, 조금 더 현명한 어른이 되기 위해. 그 선택이 생기자 비로소 나는 나의 시간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