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몸을 붙잡고, 하나는 생각을 붙잡는다
나는 더 이상 성과를 내기 위해 공부하지 않기로 했다.
더 많이 이해하고, 조금 더 현명한 어른이 되기 위한 공부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고 살아 있기 위해 하는 공부는,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렇게 나의 생각을 붙잡았던 것은 철학이었다. 철학 책을 현대의 언어로 풀어쓴 해설서가 아니라, 원문의 철학책을 읽고 싶어졌다. 알랭 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을 통해 철학이 일상과 분리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고,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예술 작품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이 궁금해졌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아니다. 현대미술, 그중에서도 개념미술에 대해서는 솔직히 회의적인 시선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미술이 늘 마음을 붙잡았던 이유는 분명했다. 답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작품은 나에게 생각할 공간을 주었고, 해석할 권위를 넘겨주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은 채, 내가 하는 생각 그 자체를 허락했다. 그 자유로움이 좋았다.
도널드 저드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글을 읽기 시작하자, 생각은 다시 자연스럽게 철학으로 기울었다. 이 감각을 담아낼 수 있는 언어는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읽게 되었다. 한창 통역을 하던 시기, 설명할 수 없었던 답답함과 번역을 아무리 퇴고해도 완성되지 않는 느낌에 대해 그는 묵묵히 답을 건네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하고 싶은 공부의 방향이 또렷해졌다. 철학 중에서도,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과 맞닿아 있는 ‘언어’를 공부하고 싶어졌다. 그러다 보니 생각은 자연스럽게 독일어로 뻗어 나갔다. 많은 철학 번역서가 중요한 개념 옆에 원어를 괄호로 남겨두고 있었고, 그 언어는 대부분 독일어였다. 내가 관심을 갖고 읽던 책들 역시 원서는 독일어로 쓰인 것들이었다.
언제쯤 그 언어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을지, 영어만큼 익숙해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질문은 잠시 접어두었다. 대신 지금의 나를 붙잡을 수 있는 일정 위에 몸을 올려놓았다. 매일 아침 9시부터 12시 30분까지, 남산의 괴테인스티튜트에서 독일어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몸을 매일 새벽, 독일어를 공부하러 가는 길 위에 올려두었고, 나의 생각은 그 너머—언젠가 그 언어로 철학을 읽고, 스스로 해석할 수 있을 미래—에 두기로 했다. 하나는 나의 몸을 붙잡고, 하나는 나의 생각을 붙잡는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기에, 나는 지금의 시간을 버티는 대신 살아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