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가치
감정적인 소비가 버겁다는 이유로 소설류를 즐겨 읽지 않는 편인데, 특히나 고전은 물리적 거리감 때문인지 심적 간극이 심해 읽는 데 꽤 많은 힘을 소비했다. 사전에 줄거리나 작품이 갖는 의미 등을 이해함으로써 극복해보려 하였으나 작품 내 문장의 맛을 음미하기엔 필자의 감정선의 공백이 커 결국 해소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름의 해석을 통해 느낀 점을 서술해보려 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흥미로움과 동시에 괴로움을 느낀 부분은 인물들의 감정적 대사를 통한 서사이다. 특히, 오이디푸스의 대사는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어색하면서도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오히려 채 정제되지 못한, 여과되지 않은 날 것의 감정이 나를 짓누르는 듯하였다. 마치 상황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그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 심적으로 고통스러웠다. 동시에, 괴로움 속에 울부짖고 흐느끼는 감정의 흐름에서는 시대적 배경과는 별개로 인간의 본성임을 느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오만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결코 그럴 순 없다.”는 것과 같은 대사를 두 번 반복하는 장면이 나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사실관계에 입각한 비소설류를 즐겨 읽는 나에게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그저 비효율적이거나 실수쯤으로 여겨졌겠지만, 이 표현을 극의 흐름과 인물의 감정을 고려해 읽는다면 이는 불가결한 요소일 테니 말이다.
그의 독백을 읽다 보면 자신을 악인으로 몰아가는 그의 행태가 인간적으로 안타깝고 동질감 같은 것이 생겼다. 하지만 개념과 실체는 다르다고 하지 않는가. 비극적 상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언어’라는 수단은 그의 감정적 깊이를 모두 담아내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크레온을 통해 얻은 신탁,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코러스, 오만과 착오라는 하마르티아(결함) 등 수많은 장치적 요소들은 문맥에 당위성을 부여하지만, 극을 읽기 전 들었던 내용이 활자화되어 상기되니 극 내 인물 자체에는 깊이 이입하지 못하여 아쉬웠다.
하지만, 이러한 장치적 요소의 존재감을 곱씹으며 느낀 가치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먼저, 뮤지컬과 같은 극의 형식은 '일상과는 다름'으로 인하여 개인적으로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 작품 내 코러스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다 보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다수의 사람이 등장해 생성해내는 음성의 상쇄는 표면적으로 웅장함과 비장함이 느껴졌다. 또, 내레이션인 듯, 신탁인 듯 신비한 존재감을 자아내는 코러스는 목소리가 겹쳐짐으로써 하나 혹은 다수의 인격이 아닌 인간, 그 이상의 존재로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다시 말해, 소리의 증대는 단순한 위압감 따위의 분위기를 넘어 새로운 존재감을 부여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두 번째는 하마르티아(결함)와 '그의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에 관한 문제이다. 대부분은 그의 오만과 착오라는 성격적 결함이 원인이라고 여긴다. 그러한 그의 특성이 글의 흐름을 주도했으며, 사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그의 운명적 결함이 비극을 초래하였다고 여긴다. 신탁은 미래를 내다보는 것으로서, 일어나고야 말 예언이다. 결국 신탁대로 모든 일이 흘러간 것은 단순한 그의 과오가 아닌 흐름일 뿐이다. 미리 안다고 해서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굴레 말이다.
모든 상황적 요소가 맞물려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과연 오이디푸스의 성격적 결함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신탁이 무시한 것을 죄라고 칭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점이 생긴다. 사건이 일어나고서야 현실이 되는 신탁을 토대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과연 그의 오만인가.
필자의 대답은 모두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성격적 결함은 운명적 결함을 구성하는 요소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의 오만과 성급함을 성격적 결함이라고 치부한다면, 그의 운명은 온당한 듯 여겨진다. 인과응보(因果應報)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비극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이와 같지 않은 맥락이다. 많은 이가 공감하고 그의 비극을 안타까워하는 만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 결함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모두 비극을 겪어도 온당한 존재일까.
신의 목소리를 빌려 인간의 운명을 예언하는 신탁. 앎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불가결한 필연성. 이러한 모순점은 인간의 운명 속 발견할 수 있는 모순적 특성을 시사한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그 스스로 눈을 멀게 한 행위에 관해 서술해보려 한다.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에 대한 답을 자의적 행위를 통하여 신탁에 저항하고 자유의지 표명하는 듯해 보인다. 이때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의 비극에 동정함과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얻는 듯하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를 이용해 시각을 포기하는 방법이나 그의 정치적 위치를 놓고 바라본다면 그의 행위가 진정으로 자유의지를 나타낸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처절하지만 폭력적인 그의 행위는 잠깐이나마 감정적 충격과 해소를 동시에 선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적 충격을 통해 독자들의 초점을 흐리려는 것은 아닌가. 시각을 포기하는 행위는 언뜻 보아 운명적 결함을 벗어나고 해결하는 듯 보이지만, 필자에게는 자신의 심적 부담감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듯 회피적 행동으로 비친다. 나름의 면죄부를 생성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극의 흐름을 위한 장치적 요소들을 다시금 되짚어보니, '비극'이 가지는 가치를 재정립할 수 있었다.
'인간은 한계에 부딪혀 고통과 슬픔에 마주하였을 때, 자신의 정신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였다. 비극이란, 인물과 배경 등의 장치적 요소를 이용해 상황과 독자의 감정을 극한까지 몰아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독자의 깨달음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방편이라 할수 있다. 감정을 다루는데 익숙하지 않은 필자에게는 비극을 읽는 경험 자체가 고역이었지만, 간접적 경험을 통해 감정 근육을 단련시키는 훈련도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