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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만 쓰고 싶어요 교수님

하루 종일 글 쓰는 대학원생

by 치킨무

지금 시간 새벽 3시 38분. 하루 종일 노트북만 보면서 논문 쓰고 프로포절 쓰다가 나자빠져서 침대로 다이빙.

유튜브에 들어가 영상휙휙 넘기다가 자기 계발 동영상 보고 다시 각성해서 앉았다.


어렸을 때, 문과에서 이과로 옮겨갈 때 가장 좋았던 것은 이제 의미 해석 그만하고, 논술 그만 쓰고 데이터로만 이야기하는 삶을 살겠지! 였다. 하지만 과학자도 진짜 숫자로만 대화하지 않는다. 염기서열로 대화하지도 않고 공식으로만 대화하지 않는다! 'AUGACGGAU' 하면 'MetThrAsp?' 정도는 하겠지만(?) 이걸로 응~저녁에 학교 앞에서 보자고? 이런 대화가 되진 않는다는 거다. 얼마나 똑똑하든 얼마나 기발한 생각을 했든 우리에게도 이 지식을 올바로 전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문과로 보낸 나는 나름 이런 쪽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10년 동안 작가가 의도하지도 않은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면서 보냈는데, 내 뇌 속에 있는 의견을 꺼내서 말하는 게 뭐가 어렵냐고 생각했었다. 사실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대학교에서 글쓰기라고 해봐야 수업 안에서, 그리고 정해진 틀이 있는 프로젝트 안 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인풋과 리소스들이 존재했고, 나의 역할은 대부분 그것들을 잘 조각 맞춰서 발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는 정말 차원이 다른 글쓰기를 하게 되는 것 같다. 논문 쓰는 거, 프로포절 쓰는 거, 늘 어렵다고 들어는 왔다만.. 이렇게 창조의 고통과 번뇌 속에서 즙짜듯 써야 되는 것인 줄은 몰랐다. 나와 교수가 텔레파시 하듯 이해하던 개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을 넘어, 내가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없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제2의 언어인 영어로 설명하는 것은... 이야기만 들어도 너무 하지 않은가?


앗 솔직히 모국어인 한국말로 써도 잘 못쓸지도..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이미 느꼈겠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안 읽은 사람들은 더 잘 느꼈을 것이고. 아이고 사실 내가 이렇게 불평해봐야 무엇하겠는가, 피피티에 일렬로 늘어져 있는 데이터와 그림들은 세상에 나가기만을 기다리며 옹기종기 나만을 보고 있다. 내가 태어나게 만든 내 새끼들 어떻게든 세상 빛보고 들어가게 하는 게 내 임무이겠지 싶기도 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정확히 보고 있다. 나도 내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다. '실험에 시달리며 끝없이 창조 글쓰기를 이뤄가야 되는 대학원생의 졸지 않고 깨어있기 위한 주절거림' 정도로 읽어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이다. 너무 감사해서 어디 사시는지 알기만 한다면 그쪽으로 손키스라도 보내드릴 것이다.


대학생 때 다니던 유학생 교회에 눈문-기계로 불리며 다른 대학원생들에게 선망의 눈빛을 받으시던 박사분이 계셨는데, 그땐 그게 뭐가 대단한지 몰랐다. 지금 그분을 만난다면, 내 눈에서 나오는 빔으로 그분을 기절시켜버릴지도 모른다.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한 줄만 적고 다시 프로포절 쓰러 갈 거다. 사실.. 이게 몇 번째 사실이야? 진짜 진짜 최종 최최ㅊ종 사실... 나는 그래도 이런 과정이 좋다. 영혼을 태워 만든 실험 데이터를 남은 재를 끌어모아 다시 태우고 태워서 무엇인가 만들어가는 과정이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유노왓암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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