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은 슬픔을 거슬러 고개를 내민다 3
X와 A는 작은 마을의 오래된 커플이다. 그해 12월 작은 파티를 여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할 계획이었다. 마침 내가 불가리아에 머무르고 있다고 소식을 전하자 조촐한 혼인파티 초대장을 보내왔다. 소피아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 값을 내주겠다는 걸 말리느라 애를 썼다.
가족 외에 파티에 참석한 친구는 나와 M 뿐이었다. X와 절친한 M은 국제인권기관에서 일하고 있는데, 몇 년 전 이집트로 발령이 났다. 혼인식을 크리스마스 주간에 하기로 정한 건 M의 휴가 기간에 맞춘 것이었다. 아르베카는 카탈루냐 지방의 작은 마을이고,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대도시로 나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멀리 사는 친구들이 혼인식에 온 셈이었다.
빵과 삶은 새우, 각종 치즈와 하몽, 올리브 절임, 정갈하게 썰린 토마토와 과일들. 조촐한 저녁식사였다. 시작도 끝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결혼 소감도 발표하지 않았다. 나는 소피아 공항에서 급하게 사온 라키아 한 병을 건넸다. M은 축구공과 축구화를 사 왔는데 X가 어릴 적 갖고 싶어 한 것이라고 했다. 선물마저 결혼식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으나, 모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르베카에 며칠 더 머무르기로 했다. M은 고향집에 온 김에 길게 머무르려던 참이었다. 그때 나는 인생의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앞날을 텅 비워둔 채 살아가고 있었다. 마침 소방관인 X는 긴 휴가 기간이었다. 분기 단위로 근무와 휴가를 나눠 쓰는 듯했다.
우리는 아침마다 운동장에서 만났다. X는 복귀전까지 체력 시험에 통과해야 했으므로 조깅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첫날 나와 M은 5분도 채 뛰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먼저 가! X는 씩 웃더니 앞으로 달렸다. 이튿날부터는 X의 아버지가 키우는 레트리버 한 마리도 조깅에 참여했다. 그날 역시 우리는 먼저 가라고 힘겹게 손짓했는데, 이번엔 X와 개가 동시에 우리를 쓱 쳐다보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꽤 살집이 있어 보이는 개의 꼬랑지가 멀어지자 나와 M은 눈을 한 번 맞추고 속도를 냈다. 네게는 뒤처지지 않으리라!
어느 날 저녁에는 소방서까지 산책을 했다. 거기에는 타이거가 있었다. 그는 X보다 직급이 높은 소방관이었다. 우락부락한 몸과 생김새가 호랑이를 닮아 타이거라고 불렀다. 친절함에도 형태가 있다. 타이거의 친절은 불쑥 등 뒤로 돌아와 소방 모자를 머리에 씌우거나, 갑작스레 방화복을 입혀주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소방차에 올라타 사이렌을 울려주었다. 네가 보스 마음에 든 모양이야! X가 귓속말로 알려주기 전까지 어리둥절한 자세로 내게 벌어지는 일들을 방관하고 서 있었다. M은 타이거식 친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소방서 밖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왔는데 타이거 안 보고 가도 돼?
으으, 내가 마을을 떠난 건 타이거 같은 이웃과 매일 보는 게 싫어서야.
M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타이거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어깨를 비비며 살기에는 버거운 모양이다. X는 익숙하다는 듯이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내 마을에 도착했다. 작은 광장에서 노부부와 개 두 마리가 산책하고 있었다. X는 그쪽으로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봤다. 이제까지 보지 못한 것이어서 나도 모르게 그의 기분을 살피며 걸었다.
저 사람들 집시야.
그러자 M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
X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싫어하는 건 집시가 아니라, 개가 싼 똥을 치우지 않는 개주인 부부야!
이번에는 M의 단호한 말투가 느껴졌다. 그러자 X는 지고 싶지 않다는 듯 말했다.
집시를 집시라고 부르는 게 뭐가 어때서?
M은 호흡을 두어 번 가다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게 X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타이거 같은 이웃이 싫다고 마을을 떠난 녀석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인권이니 그런 거 말이야! 난 저 사람들을 집시라고 부르고 가끔 싸워도 한 마을에 살고 있어. 소방관으로서 그들이 위험에 처하면 구하러 갈 거야.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어도 같이 살아갈 거라고.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다는 사실은 점점 잊히고 있었다. 티격태격하는 사이 X의 집에 도착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A는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거실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그리고는 내게 주방 식탁으로 오라 손짓했다.
내버려 둬. 서로 좋아서 저래.
A는 내게 저녁 식사 준비나 같이 하자고 했다. 우리가 타이거를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부터 오늘 저녁은 자기가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식탁에 앉아 생마늘 껍질을 하나씩 벗기는 사이 A는 하몽과 치즈를 보기 좋게 그릇에 올렸다. 싱크대 아래 올리브 절임까지 식탁에 놓았다.
그만하고 저녁 먹자!
식탁의 주인은 A다. 그의 허락 없이 언성을 높이거나 싸우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입을 삐죽 내미는 것도 금지다. 눈치 빠른 M은 가방에서 자기 어머니가 직접 담근 올리브 절임 두 통을 꺼내왔다. 하나는 내 몫이었다.
역시 올리브 절임은 우리 동네가 최고야!
M이 말하자 X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렇지? 너도 언제가 마을로 돌아올 거지?
M은 말없이 올리브 절임을 입에 욱여넣었다. X도 더는 묻지 않았다. A는 내 쪽을 보며 찡긋 윙크했다. 그러더니 빵을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게 좋으면 니들 둘이 결혼하지 그랬냐?
수염 난 녀석을 질색이야!
이렇게 얼굴이 긴 놈이랑?
이 자식 방귀 냄새 얼마나 지독한지 알아?
쟤는 샤워도 자주 안 한다니까!
그해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우리는 밤새 좋아한다는 말 주변을 한참 동안 빙글빙글 맴돌았다.
나와 M은 같은 날 아르베카를 떠났다. X는 바르셀로나 공항까지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아쉬움이 서려 있었으나 누구 하나 그걸 말로 하지 않았다.
잘 가라.
잘 있어라.
그게 전부였다. 공항 앞에서 X의 차가 멀어지는 걸 지켜봤다. 금세 사라졌다. 곧장 M의 어깨가 떨렸다. 그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고르고 골랐다.
걔한테 네가 울었다고 말하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