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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슬픔이 데려다주는 곳

기쁨은 슬픔을 거슬러 고개를 내민다 2

by 양주안

X의 메시지는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을 동봉하여 날아든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안부를 전한다는 건 그런 뜻이다. 친구의 기쁨과 슬픔을 어느 날 갑자기 떠안아 버리는 것이다. 서로를 친구라 부르게 된 지도 십 년이 되어간다.

아르베카는 서울에서 태양 반대편으로 일곱 시간을 거스른 곳에 있다. 시속 구백 킬로미터로 높은 바람을 타고 나는 비행기로 열 시간은 가야 하고, 공항에서는 말보다 빠른 차로 두어 시간 달려야 한다. 정말로 멀고 먼 곳에 산다.

우리가 만나려면 결정적인 조건과 이유가 필요하다. 긴 휴가가 주어지거나, 서로의 도시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한다. 비행기 삯을 낼만한 돈도 필요하다. 몇 가지 조건을 채우고 나면 그곳에 가야 할 결정적 이유를 찾아야 한다. 주어진 시간과 돈을 쏟아 친구를 만나러 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장소에서 다른 경험을 쌓을 것인가.

지난 십 년 동안 X와 두 번 만났다. 휴가가 주어질 때마다 나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좋아하는 친구라 부르지만 그것만으로 일 년에 한 번 마주할까 말까 한 긴 휴가를 쏟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주어진 것들을 돈독하게 다지는데 시간과 돈을 쓰는 건 어려운 일이다. 세상이 다채한 까닭이다.

새로움은 깊이의 적일까 동지일까. 세상을 알아간다는 건 단지 많은 경험을 했다는 말로 일갈하기 어렵다. 수많은 인연이 곁을 스쳤으나 삶을 한 걸음 나아가게 한 사람은 손에 꼽힌다. 새로운 경험을 쌓는 건 이를테면 목차를 나열하는 일 같다. 쓸 수 있는 주제에 걸맞은 소제목을 무작정 펼쳐놓는다. 그 가운데 정한 방향과 맞는 것들을 채에 거르듯 남겨둔다. 수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기억에 새겨진 몇 개의 순간을 고르고 고른다. 쓸 만한 소제목을 남겨두려면 그보다 몇 배 많은 소제목이 필요하다. 그것이 잊힐 기억들의 쓸모다. 적어도 나의 세계에서 새로움은 깊이의 동지인 셈이다.

가끔 전하는 기쁨과 슬픔은 우리가 서로의 인생에 작게라도 머무르려는 의지다. 그의 안부는 항상 나를 어느 시절로 데려가고는 한다. X의 장인이자, 나의 샌드위치 동무였던 아르베카 라디오 진행자의 죽음이 그러했다. 별안간 닥친 슬픔이었고 한 번 더 얼굴을 보지 못한 것에 관한 후회였으나 그 감정들은 기어코 나를 기쁨이라 부를 만한 순간으로 이끌었다. 하몽 샌드위치를 먹던 아르베카의 작은 카페와 알아듣지 못할 라디오 방송을 듣던 저녁과 마지막 멘트를 들으며 서로의 주파수를 맞추던 식탁으로.

몇 달의 공백을 두고 찾아오는 메시지는 이따금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몇 해 전 X에게 소식을 전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에게 뜻밖의 슬픔을 주었다. 나를 짓누르는 커다란 후회 한 조각을 떼어내 친구의 어깨에 허락도 없이 얹었다. 염치없이 모르는 이의 죽음을 애도해 주기 바랐다.

뜻밖의 슬픔이 우리 사이에 하나씩 늘어나고 있다. 새롭고 슬픈 소식은 끝내 우리가 함께 기뻤던 순간으로 이끌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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