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진실에 닿았을 때마지막 인사를 했다 6
누군가와 만나고 애정을 쌓는 게 멈출 수 없는 종류의 일이라면 차라리 제대로 헤어지는 법을 찾고 싶다. 한 시절을 끝에서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일 수만 있다면. 작별의 아픔을 서로의 등에 반씩 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외롭지 않은 작별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헤어지고 싶다. 이미 지나버렸거나 아직 한창인 애정 가득한 시절의 묘비에 이렇게 적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산뜻한 안녕.
‘또 보자’는 말로 당장 마주해야 할 슬픔으로부터 도망칠 때가 있었다. 진심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경작하는 것이다. 저절로 완성하는 마음이란 없다. 힘들이지 않고 드러내는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워진다. 진심은 몸으로 완성하는 마음이다. 행동하지 않는 결심은 끝내 빈말이 된다. 이제껏 또 보자는 말로 작별을 유보한 일이 많았다.
밤이 지나면 정말로 끝이다. 아홉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마마는 벌써 방에 들어갔을 테다. 마음은 시간을 거슬러 이어지기도 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마가 여든이 넘은 노인이라는 게 내가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함부로 또 보자고 할 수 없었다. 기약이란 젊음의 오만이다.
마마는 종교가 있어요? 다른 세계로 도망가고 싶었다. 천국이나 연옥이나 극락 같은 곳으로.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세계가 아닌가. 저마다의 희망으로 채워진 다채로운 공간이 아닌가. 나의 천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절반이 재회다.
"태어날 때부터 가톨릭 신자였단다. 성당에 나가지 않지만 내가 신자라는 사실을 잊어 본 적이 없어. 하느님도 나를 잊지 않을 거라고 믿으니까."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도 하느님이 정말로 기억해 줄까요?"
"그럼 당연하지! 오래전에 죽은 남편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 고약한 잠버릇까지도 생생해. 그런 걸 보면 알 수 있단다. 하느님도 나를 세세하게 기억하고 계시다는 걸 말이야. 사람은 하느님 모양으로 지어졌거든."
"그러면 마마, 나도 오래 기억해 줄 수 있어요?"
"기억은 억지로 하는 게 아니란다. 자연스럽게 남는 게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야. 이제껏 참 많은 사람을 겪었어. 그런데 말이야 정말로 사랑한 사람이 몇이나 되나 돌이켜보면 한 줌도 안 돼. 그들마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인생을 이기적으로 살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어."
목구멍에서 커다란 공기 덩어리가 솟아올랐다. 말을 이어가려고 숨을 골라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반이 손으로 휴지를 돌돌 말아 눈가에 대 주었다. 마마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마마를 오래 기억할게요, 하고 말하려다 말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시간을 경솔하게 정리해버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이 슬픔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으면 했다. 힘 빠진 어깨가 축 늘어져 볼 품 없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지금이 어쩌면 두 번 다시 마주하지 못할 순간일 지도 모른다. 이제껏 또 보자는 말로 유보해 둔 숱한 인연과도 여기서 헤어지기로 했다.
모두가 방으로 돌아간 밤. 내일 해야 할 마지막 인사말을 정해두었다. 습관처럼 또 보자는 말이 나올까 짧은 문장을 입으로 되뇌었다. 아디오스. 스페인 친구에게 기약 없이 헤어질 때 쓰는 인사말이라고 배웠다. 다음 만남을 신에게 맡긴다 혹은 신만이 알고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 누구든 작별 앞에서는 다른 세계로 도망가고 싶은 게 분명하다. 아주 오래전 언어학자들도 작별을 앞에서 약간의 희망을 남겨 두었다. 영원한 안녕이 아니라 신에게 다음을 맡긴다.
나의 천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절반은 재회다. 개도 있고 이구아나도 있고 짝꿍도 있고 짝사랑도 있다. 그중 천국에서마저 함께 살고 싶은 게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제야 내 삶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한 줌도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나머지는 단지 헤어지지 못한 미련 아니면, 거기까지가 딱 좋을 인연이다.
침대에 누워 사랑하는 사람들 이름을 헤아렸다. 마마와 이반도 지금이 아닌 언젠가에 기억나는 사람이면 좋겠다. 한 줌 조금 넘치더라도, 그러면 더없이 좋겠다. 이제는 신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