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진실에 닿았을 때마지막 인사를 했다 5
시간이 묻어 있는 장소에서는 순식간에 마음의 빗장이 풀리기도 한다. 금연 선언을 해본 이는 습관이 깃든 장소의 힘을 알 거라고 믿는다. 매일 담배 피우던 골목을 지나갈 때 손이 떨릴 정도로 그 시절과 애틋해지는 경험을 해보았으리라. 습관으로 길들여진 장소는 어렵게 내린 결단을 한순간에 흔들어놓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진심은 때와 사람을 무척이나 예민하게 가려가며 모습을 드러내지만, 어떤 장소에서는 제멋대로 튀어나온다.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는 말을 이제껏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가끔 마음이 내 의지와 다른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서 진심을 몸 안에 가두는 방법을 익혔으나 어떤 장소에서 지난한 노력이 허무하게 무너지기도 한다. 이반의 자동차처럼 습관이 깃든 장소에서 말이다.
이반은 차 안에서 유독 말이 많아진다. 마치 장소에 따라 변신하는 사람 같다. 집에서 그는 엉뚱하다. 하는 말의 태반은 농담이고 밥을 먹다 말고 피아노를 친다거나 하모니카를 불기도 한다. 그런 그가 운전대만 잡으면 다른 사람이 된다. 꽤나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는데 어쩌면 이 말들이 하고 싶어서 집에서 그토록 광대노릇을 하나 싶었다.
그는 흥미로운 질문으로 주의를 끈 뒤 자기 이야기를 푼다. 마치 수업 같다. 고등학교 영어 교사이므로 직업병이 아닐까 싶다.
대학시절 한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멋진 선생은 명확한 답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지만 좋은 선생은 난처한 질문으로 학생의 삶을 어지럽힌다. 교수님은 두 선생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했다. 이반은 후자에 가깝다. 차가 집 앞 오솔길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나는 그를 도로 위의 선생이라 불렀다.
오래 사랑하다 헤어진 부부가 있어. 다시는 보지 않기로 맹세하고 돌아섰지. 그렇다면 이제 두 사람은 영원히 끊어진 걸까?
길고 깊은 질문을 매끄럽게 뱉어내는 걸 보니 이 수업을 오래 준비한 게 분명하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듣자 하니 분명 자전적인 질문이다. 대답에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다시 교수님의 말이 떠올렸다. 누군가 난처한 질문을 하면 우선 ‘멋진 질문이야!’라고 대답한 뒤 재빨리 질문 안에서 다른 의문점을 찾아 되물어보라는 것이다. 대답하는 동안 자기 생각을 천천히 정리할 시간을 벌게 된다고 했다. 또 운이 좋으면 그의 대답으로부터 내가 해야 하는 말을 찾아낼 수도 있다고도 했다. 교수님이 내게 가르쳐준 최고의 대답은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하는 말이 반씩 섞인 것이다.
오래 사랑했다는 건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을 말하는 거죠? 1년? 10년?
그러자 이반이 내 쪽을 쳐다보며 지긋이 웃었다. 반짝이는 눈동자에 서린 건 즐거움이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월척을 낚은 낚시꾼의 표정 같다면 이 오묘한 분위기가 잘 기억될까?
사소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거대한 주제를 펼칠 때가 있다. 이반은 몇 해 전 아내와 헤어진 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것 같다. 시간을 벌기 위해 주제에서 비껴간 의문을 던졌고, 그게 우연히도 질문의 진짜 이유였던 셈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평소에 몇 배는 걸린다. 첫인상에서 끝인상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거리의 이야기이므로. 이반이 아내를 좋아한 이유는 꿈이 또렷한 모습이 멋져 보였기 때문이고 둘이 헤어진 이유는 아내의 꿈이 너무 또렷해서라고 했다. 아내가 이반을 좋아한 이유는 엉뚱한 모습이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고 둘이 헤어진 이유는 한없이 엉뚱하기만 해서 당최 자기 말을 진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라고 했다.
마을 사이 좁은 도로를 돌고 돌아 결국 처음과 끝이 닮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두어 시간 동안 차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집과 아주 멀리 떨어져 버릴 것처럼 달렸다. 익숙한 오솔길이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그랬다. 다시 여기 오려고 우리는 좁고 비탈진 산길을 돌고 돌았다. 그때 나는 이 수업의 첫 번째 질문을 떠올렸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영원히 끊어진 거예요?
한번 곁에 머문 사람은 절대 끊어지지 않아. 사람에게는 헤어져도 이어지는 마음 같은 게 있거든. 진정한 사랑을 나눈 부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신은 인간에게 시간을 줬어. 그중 얼마만큼은 혼자서 보내야 하고 나머지는 누군가와 함께 해야만 해. 어떤 사람과 완전히 끊어진다는 건 지난 시간의 나도 사라진다는 뜻이야. 나와 아내는 아직 오지 시간을 함께하지 않기로 한 것뿐이야. 이미 지나간 시간은 간직할 수밖에 없으니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우리의 오늘은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과 보낸 시간들이 모여서 만드는 거야. 그러니까 누군가와 함께 지낸 날들을 소중히 생각해야 해. 그건 너의 오늘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거든.
기나긴 수업이 끝에 다다르자 집이 보였다. 멀리 마마가 서 있었다.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신 모양이다. 쉰이 넘어도 엄마에게 아들은 도대체 못 미더운 존재다. 차 문을 열자 이반은 광대가 됐다. 마마, 마마, 하며 엄마를 꼭 끌어안고 춤을 추다가 엉덩이를 한 대 맞았다. 나이 오십이 면 하늘의 뜻을 안다고 하던데 엄마에게 어리광 부리는 것이야말로 자식의 천명이 아닐까.
멀리부터 밤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득한 어둠이 금방이라도 오늘을 집어삼켜버릴 듯하다. 불빛이 많지 않은 마을의 하루는 이르게 저문다. 벌써 밤이라니, 시간은 우리를 따듯하게 둘러앉혔다가 차갑게 흩어 놓을 게 분명하다.
당장은 웃기로 했다. 식어버린 고기 수프를 앞에 두고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둘러앉았다. 작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서로에게 다가섰다. 헤어져도 이어지는 마음이라는 걸 믿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