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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지런히 가까워지고 있다

아주 작은 진실에 닿았을 때마지막 인사를 했다 4

by 양주안

구부러진 길을 따라 몇 번이고 몸을 갸우뚱한다. 마마에게 기다리지 마시라 당부하고 나온 참이다.

어디로 가고 싶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보다 머릿속이 더 복잡하게 꼬인듯했다. 여기 와서 한 번도 내가 가고자 한 장소를 물은 적이 없다. 그뿐 아니라 나조차도 그랬다. 기껏 떠오른 장소라고는 이반의 집, 마트, 아침마다 음식을 가져다주는 그 집이 전부였다. 요 며칠 이반이 가는 곳이 곧 내가 가야 할 장소였다.

그런 삶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든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전부 일상적인 것이었고 내가 여기 눌러앉지 않는 한 모든 장면은 마지막이 될 터였다.

내가 마주한 건 가고 싶은 장소를 정하는 일이 아니었다. 갈 곳이 없어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 그쪽을 애써 보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어디로 가고 싶으냐는 말은, 마마에게 오늘은 기다리지 마시라 전한 당부는, 끝으로 향하고 있다는 명백한 이정표였다. 적절한 장소를 골라야 했다. 이 짧은 동거의 마침표를 찍기에 좋은 곳, 서로의 시간이 조금씩 묻어 진심을 털어놓기 알맞은 곳-아! 거기가 좋겠다.

조그만 공터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촘촘한 풀들이 누웠다 일어나면 바람에도 모양이 생긴다. 유난히 울퉁불퉁하게 생겨 먹은 놈이었다. 풀이 고개 숙이는 쪽을 유심히 쳐다봤다. 유연하고 가느다란 풀대가 사이로 혼자만 경직된 채로 서 있는 걸 보려고 애썼다. 이만한 바람에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인해서 자연스레 흩날릴 줄 모르는 이질적인 존재. 우리는 사슴을 기다렸다.

공익근무를 하던 시절 어르신 도시락 배달이 내 업무였다. 늙은 시츄와 함께 사는 할머니가 해준 말이 있다. 뭐든 보려고 하면 안 보여, 귀한 게 있으면 얼른 고맙습니다 하고 주워 담으란 말이야. 그리고는 사탕 한 움큼을 내 주머니에 쑥 밀어 넣었다. 당최 사슴은 보이지 않고 할머니 말만 귓가를 뱅글 돌았다.

사실은 말이야, 사슴을 무서워해. 나는 할아버지의 사슴 농장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둘 꺼내놓았다. 밤마다 비명처럼 들리는 울음소리, 대가리에서 흐르는 체액, 놀라운 점프력, 암흑 같은 눈동자. 딱히 비밀은 아니지만 굳이 말할 필요 없었던 나에 관한 사소한 진실이었다. 이반은 가만히 들었다. 동조하지도 반문하지도 않았다. 이야기가 끝날 즈음 그는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창밖을 뚫어져라 보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속삭였다.


사슴이야!

어어...!

뻥이야!

어?!


무르팍까지 고개를 쳐 박은 내 모습을 보며 이반은 깔깔 거리며 웃었다.

너처럼 시시한 녀석은 처음이야!


한바탕 웃은 뒤 이반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윽고 이 집과 그 집 사이에 벌어진 일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사슴을 기다리는 이 풀숲은 아주 오래전 두 집안이 함께 가축을 풀어놓던 곳이었다. 나름대로 서로 배려하며 양과 염소를 풀어놓았는데, 아무래도 서로 조금씩 눈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건은 이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벌어졌다. 그 집 사람들이 풀숲에 가축을 풀어놓고 제때제때 자리를 비켜 주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때마침 마마는 조용히 가축을 정리하고 다른 일을 찾아 나섰다. 열 살도 안 된 꼬마 이반은 이 모든 게 다 그 집 횡포 때문이며 아버지가 없어서 당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어차피 마마는 가축을 정리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혼자서 자식에 가축까지 키우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물론 풀숲을 점령해 버린 그 집 사람들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마마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여겼다.

이반은 이 이야기를 하는 게 부끄럽다고 했다. 그 집 아들에게 퍼붓는 말들은 마치 철천지원수에게나 할 법한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까지 미워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고 했다. 이상하게 그 집 이야기를 할 때면 열 살 꼬마가 불쑥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물었다.

그 사람이랑 차 마실 때 무슨 얘기해?


이반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뒷마당에 꽃이 폈다느니 밤에 모기가 줄어든 것 같다느니 하는 말들......


푸핫! 정말 시시하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일주일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에 사슴은 없었다. 햇빛이 사선으로 들어와 얼굴을 반씩 비추고 있었다. 바람은 여전히 풀숲에 발자국을 남기며 지났다. 무척이나 시시한 마지막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이지 부지런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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