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진실에 닿았을 때마지막 인사를 했다 2
주방과 곧장 이어지는 거실 한가운데 접이식 침대가 내 공간이다. 음식 냄새가 이 집 어느 방보다 신속하게 공기를 점령한다.
푹 끓여낸 토마토에 돼지고기를 잔뜩 넣어 만든 수프가 끓고 있었다. 오늘은 따듯한 국물에 고기와 빵을 적당히 곁들여 먹겠구나.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휘감아 돌았다. 완벽한 아침이다.
이불을 정리하고 침대를 접어 올렸다. 왼쪽에는 방 안에 앉아 있는 이반이 보였고 정면으로는 마마가 서 있었다.
굿모닝!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인사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려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 각자 할 일을 했다.
마마가 등을 돌린 속도와 입을 다문 채 굳은 이반의 표정,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모자, 두 사람의 등과 등 사이로 난 골짜기에서 날카로운 냉기가 흘렀다. 터무니없는 고요가 집안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때 나는 굿모닝을 외쳤다. 눈치 없는 안부가 메아리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이윽고 이반이 구시렁구시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질적인 말투였으나 은근하게 속이 시원했다. 이 민망한 침묵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구멍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이반은 내 앞에서 슬로베니아어와 영어를 동시통역하듯 번갈아 사용했다. 마마와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이고 혼잣말도 그렇게 했다.
방에서 구시렁대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구시렁거리는 소리의 크기였다. 정확히 마마 귀에 들릴 만큼의 혼잣말이었다.
뜻밖의 냉기가 집안을 덮었다. 누군가 설명해 주기 전까지 이유도 모른 채 적막을 견뎌야 했다. 나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속으로 숫자 백 정도 세고는 페이지를 넘겼다.
푹 익은 고기 수프가 담긴 커다란 냄비가 식탁에 올라왔다. 마마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니까! 이반은 냄비와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자초지종은 모른 채 이반이 던진 한 문장만 알아 들었으므로 입을 꾹 다물었다. 굳이 영어로 말한 걸 보면 분명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내게 들려주겠다는 신호였다.
궁금했으나 입을 더 굳게 닫기로 했다. 만약 우리가 영어로 대화한다면 마마는 혼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 사이에 끼어 있는 기분을 어느 때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딱 십 분 전까지 무척이나 고독했다. 이반은 내가 입을 다문 이유를 알겠다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 하며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우리는 고기수프 냄비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이반은 문 앞까지 마중 나온 마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만이 뒤로 돌아 손을 흔들었다. 마마는 내게 싱긋 웃어 보이다가 곧장 손가락으로 이반의 등을 가리키고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조수석 다리 아래 냄비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손잡이를 꼭 잡았다. 마마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야! 이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와 똑같은 문장이 더 차가운 말투로 튀어나왔다. 내가 무슨 일이냐 묻자 이반은 성난 아이처럼 툴툴댔다. 대체 내가 왜 그놈 아침밥을 챙겨야 하는지 모르겠어!
사실 나는 이반이 말하는 ‘그놈’의 집 앞까지 간 적이 있다. 처음 여기에 온 날 이반의 집으로 곧장 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 이웃집에 들렀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내게 금세 나올 테니 차 안에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돌아보니 그날도 이반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오늘 아침 끓인 고기수프를 먹을 사람은 그 집 아들이다.
도착하자 이반은 그를 만나봐야 그다지 기분 좋은 경험을 아닐 거라며 차에서 내리지 말라고 했다. 이윽고 그 사람들 정말 별로야, 하고 툴툴 댔다.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조용히 냄비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울퉁불퉁한 풀밭 사이를 걸어가는 이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이윽고 큭-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고기 수프가 얼마나 뜨끈하고 고소했는지 알고 있었다. 찬바람 날리며 걸어가는 사내의 손에는 따뜻하고 맛있는 소식이 들려 있다. 행여나 수프를 흘릴까 두 손으로 냄비를 꼭 쥐고 걷는다. 가기 싫어 몸부림치던 사람의 어정쩡한 발걸음이 어째 귀엽다.
수프만 건네고 오는 것도 아니다. 이웃집에 가면 차 한 잔을 꼭 마시고 나오는 것이 마을의 예절이라고 했다. 이반은 내게 적어도 십 분은 앉아 있다 와야 한다며 불평했더랬다. 미워하는 이와 나란히 앉아 갖는 티타임이라니. 이 장면만 본다면 영락없이 사이좋은 이웃이다. 두 사람에게는 곤욕이겠지만 멀리서 보는 이에게는 이만한 코미디가 따로 없다.
아주 가끔 거짓이 진실보다 큰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 있다 생각하고는 한다. 소설처럼 만들어진 이야기에서 위로를 받거나, 자기가 아닌 누군가를 연기하는 배우의 몸짓에서 희망을 볼 때 그렇다. 모두가 아는 진실을 덮어두고 보내는 티타임은 꽤나 극적인 순간이다. 엄마 잃은 아들에게 스물세 시간 오십 분의 진실보다 십 분 남짓한 거짓이 더 유용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가끔은 진실 바깥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반이 차로 돌아오자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꽃차를 대접받은 모양이다. 차 안에 고기수프 냄새가 남아 있다. 두 사람이 둘러앉아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알 길이 없다. 내가 아는 건 우리 모두 오늘 똑같은 수프를 먹을 거라는 사실이다.
서로의 혀끝에 닿을 음식이 무슨 맛인지 안다는 것, 수프가 고소하다는 것, 꽃차가 향긋하다는 것, 가족을 잃은 이는 무척이나 고독하고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을 거라는 것. 같은 맛과 향을 느낄 수 있어서 어떤 아픔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반이 온갖 투정을 부리면서도 그 집 문을 향해 걸어야만 했던 이유는 그런 것들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이반이 투덜댔다.
끔찍한 뉴스가 있어. 내일도 또 여기 와야 된다는 거야!
‘끔찍한 뉴스’라는 단서가 달렸으나 어쨌든 내일도 여기에 올 거라는 말이다. 그 순간 내가 그들의 티타임을 십 분의 눈속임 정도로 폄하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스물세 시간 오십 분의 미움이 진짜이듯이 십 분의 연민도 진짜가 아닐까. 진실 바깥의 공간에 또 다른 진실이 있는지 모른다. 이반이 험담 사이사이 끼워 넣은 ‘그 멍청이 밥이나 제대로 해 먹겠어?’ ‘사내놈이 꼴사납게 축 쳐져서는......’ 따위의 말들을 모아보니 진실 바깥의 진실 하나가 보이는 듯했다. 이반은 그를 정말로 미워하지만 혼자 아프게 두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