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워진다는 건더 많은 아픔을 알아가는 일 5
밤 열한 시. 요한과 남의 테라스. 오래된 선풍기에서 나는 굉음. 땅콩 한 봉지와 우유 한 컵. 꼬마 바나나 한 송이. 정면에서 담배를 태우는 남. 모기 물린 곳을 긁는 나. 벽에 붙은 작은 게코 도마뱀. 바람이 흔들리는 작은 새 둥지. 테라스의 풍경을 노트에 적는다. 기록은 멈추지 않는 시간을 간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한국에도 별칭이 있어?
별명 말하는 거예요?
아니, 별칭.
그게 뭐예요?
태국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별칭을 지어줘.
그럼 남 씨도 별칭이 있어요?
남이라는 이름이 엄마가 지어준 별칭이야.
그럼 본명을 뭐예요?
어차피 못 알아들을 걸. 그냥 남이라고 불러.
남은 무슨 뜻인데요?
어릴 때 내가 하도 말괄량이라 물처럼 평온한 사람이 되라고 엄마가 지어주신 거야. 물이라는 뜻이거든.
그래서 물처럼 평온한 사람이 되었어요?
엄마는 연못을 상상했지만 나는 바다가 되었어. 종일 일렁이며 파도가 들이치는 바다. 말하자면 나는 시끄러운 여자야. 그래서 엄마가 또 다른 별칭을 지어주었어. 이건 엄마가 화났을 때만 나오는 비공식 별칭이지.
그건 뭐죠?
검은 양. 하얀 양들 사이 묻은 얼룩이라는 뜻이야.
얼룩이라...... 좀 가혹한 별명인데요?
엄마는 내가 검은 양이된 게 다 학교에 보내서 생긴 일이라고 했어. 그때만 해도 여자애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거든. 그러면서도 내가 대학에 간다고 했을 때 두말 않고 허락해 주셨지.
그럼 검은 양은 어머니가 만든 거네요.
아마도?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를 검은 양이라고 불렀어.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지. 나는 네가 강한 이유를 알아. 검은 양이라서 그래. 주어진 대로 살지 않아서 주어진 것 없이 살아냈으니까. 너는 강해. 그러니 검은 양아. 하얀 새 같은 네 오빠를 잘 보살펴주렴.
오빠를 보살핀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어른이잖아요.
밥 짓는 법, 집수리하는 법, 청소도구 사용법, 이웃들과 수다 떠는 법.
그래서 오빠는 잘 배우고 있어요?
엄마는 분명 비밀이라고 했어. 자존심 상할까 봐 그랬겠지. 그런데 오빠가 비밀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야. 예전 같으면 내 말이라면 듣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야. 요새는 이웃들과 수다 떠는 법을 배우러 종종 이 집에 와.
남은 정말 바닷물 같은 사람이네요.
무슨 뜻이야?
해안가의 조약돌은 다 파도가 조각한 거잖아요. 둥글고 빛나는.
아니야, 아니야, 파도는 돌들이 부딪힐 수 있게 도와주는 거뿐이야. 결국 서로가 서로를 아름답게 만드는 거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부딪혀야 아름다워지는 거네요.
아름다워진다는 건 더 많은 아픔을 알아간다는 거야.
아유, 그건 너무 고통스러운 말인데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부딪히고 아픈 건 어차피 벌어지는 일들이야. 네 머리 위에 작은 새를 봐. 새가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우리는 몰라. 알 길이 없지. 하지만 쟤는 분명 아름답잖아. 아픈 건 아픈 거고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야.
밤 열한 시가 넘어가고 있다. 몇 분 전부터 연신 눈을 깜빡거리던 남은 그만 자러 가야겠다며 방으로 들어간다. 혼자 남은 테라스에는 오래된 선풍기의 굉음이 울린다. 반쯤 먹은 땅콩과 꼬마 바나나 하나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벽에 붙은 게코 도마뱀은 언제부터 대화를 엿듣고 있었을까. 작고 통통한 발가락이 꽤 귀엽다. 바람이 살살 불어 화분의 잎들이 부딪힌다. 스르륵스르륵, 듣기 좋다. 어떤 마찰에서는 고운 소리가 난다. 둥글고 빛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