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워진다는 건더 많은 아픔을 알아가는 일 4
매끌롱 강변 모래사장 위에 지은 작은 식당. 파라솔과 식탁이 곳곳에 놓여 있는데 아무런 규칙이 없다. 이곳에 오는 손님들이 편한 장소를 손가락을 가리키면 직원들은 식탁을 다시 정리한다. 어디나 그렇듯 강에서 멀수록 넓은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
식당 주인을 메시라고 불렀다. 축구선수 메시를 좋아하는 그에게는 바르셀로나 프로축구팀 티셔츠가 작업복이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주인은 내게 메시라고 소리치면 자기가 달려올 거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메시를 외쳤고 그때마다 주인이 나타났다. 손님들은 그의 진짜 이름을 모른다. 메시를 향한 그의 동경은 비록 이름뿐이지만 그를 진짜 메시로 만들고 있다. 군중 속에서 단 한 단어에 고개를 돌려 반응하게 만드는 것을 이름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는 정말로 메시다. 게다가 식당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가 그를 통해 해결되므로 그라운드 위의 메시와 역할도 비슷한 셈이다. 아무도 그를 축구선수 메시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모두가 그를 메시라고 알고 있다.
이따금 허풍에도 무게가 실리는 경험을 한다. 자기 말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행동을 채워 넣는가에 따라 존중받아 마땅한 허풍이 탄생하곤 한다. 나는 그가 식당 주인으로 쌓은 십 년도 넘는 경력과 그동안 메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에 경외심을 느꼈다. 제아무리 가짜 이름이라도 나름의 시간을 쌓았으면 별개의 힘을 얻기도 한다.
가끔 한적하게 앉아 점차 어두워지는 세상을 구경하는 일에 몰두하고는 한다. 밤과 낮의 애매한 지점에서만 볼 수 있는 세계의 색과 모양이 있다. 하얗게 빛나던 해가 노랗고 붉게 변모하면 은색이던 윤슬도 옷을 갈아입는다. 빛이 너무 밝으면 볼 수 없는 달도 하늘 한쪽에 떠 있다. 밤과 낮이 실은 언제나 공존하고 있다는 걸 저무는 해보다 높이 떠있는 달을 보며 알아차리고는 한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연합체다. 밤과 낮 사이 애매한 시간에만 두 개의 세계가 이루는 하모니를 적나라하게 마주할 수 있다.
이윽고 새까만 색이 세상을 고요히 감싸 안는다. 마침내 어둠이 깔리면 뭍과 물의 경계가 점차 사라진다. 세상에 그어진 수많은 선을 지우는 것이야말로 밤의 진정한 힘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진실은 마음속 가장 컴컴하고 좁은 연못에 가둬두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깊은 밤이 필요하다. 어둠은 진실의 진정한 휴식처다. 경계가 사라진 틈에 차마 말 못 한 진심을 꺼내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은 아무래도 살아있는 듯하다. 어떤 이유에서건 한 번은 밖으로 나와 숨을 쉬고 들어가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밤이 되자 탐은 내게 이상한 농담을 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내가 사놓은 맥주를 자기 컵에 따라 마신다. 탐과 나 사이를 가로지르던 가느다란 선 하나가 지워진 셈이다. 맥주 한 병이야 이천 원 남짓 하니 대단한 사건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지난 며칠 동안 내게 물 한 컵 나눠달라 말하지 않은 탐의 행동을 기억해 보면 적어도 우리 사이에서는 거대한 전환이다. 이따금 그렇다. 하찮은 사건이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천 원짜리 맥주 한 병 나눠 마시는 일로 탐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은 하늘이 우리를 포근히 감싸 안으면 가짜 메시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탐이 내게 조금 거친 농담을 하고 눈치 살피는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 가짜 이름이나 이천 원짜리 맥주 한잔에 더는 신경 쓰지 않는다.
짙은 어둠이 깔리고 저마다의 시간이 궤도를 그리며 이곳에 도착한다. 인생에 있어 지나치면 그만일 조그만 접점, 사건이라 부르기에는 약간 모자란 만남, 친구라 말하기에 조금 어색한 관계, 우리 말고는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을 오늘이 끝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