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워진다는 건더 많은 아픔을 알아가는 일 3
아침부터 남은 하얀 옷을 입고 절에 갈 준비를 한다. 어느 때보다 풍성한 음식이 식탁에 차려졌다. 이틀 동안 ‘빅부다데이’다. 상좌부불교를 믿는 태국인들은 이 기간 동안 오후에는 금식과 금주를 해야 한다. 정오가 되기 전에 많이 먹어 두는 것이 빅부다데이를 준비하는 남의 방식이다.
이십 년째 부부인 요한과 남 사이에도 여전히 합의하지 못한 일이 있다. 남은 빅부다데이 기간 동안 사원에서 밤을 보내기를 원하고, 요한은 늦게라도 집에 돌아왔으면 한다. 식탁 위에 싸늘한 기류가 흐른다. 누구 하나 양보하는 사람이 없다. 요한은 뾰로통하게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사원에 갈 시간이 다가오자 결국 남이 근사한 문장으로 항복을 선언한다.
고집불통 영감 같으니.
입꼬리가 올라간 요한은 재빨리 스쿠터에 시동을 건다.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남을 부른다. 이리 와! 데려다줄게! 뒤에 탄 남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나는 속으로 ‘요한, 제발 한 번만 뒤돌아 남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봐’하고 되뇐다. 밤에는 테라스를 비워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이 풀어야 할 무언가가 남아 있다.
“아까 남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요.”
“나도 알아. 괜찮을 거야. 빅부다데이잖아.”
“정말 괜찮아요?”
“걱정 마. 부처님이 다 해결해 줘.”
“개신교인이잖아요. 부처님을 믿어요?”
“너도 곧 부처님의 위력을 알게 될 거야”
요한은 항상 나보다 한 수 앞을 본다. 이웃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남의 표정이 밝다. 요한은 편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준다. 방문을 닫기 전 요한은 나를 보고 슬쩍 웃어 보이더니 윙크한다.
오랫동안 남과 함께 살며 얻은 요령...... 아니 통찰이라고 해야 어울린다. 어쩌면 통찰이라는 건 삶의 요령을 터득하려는 고민의 끝자락에서 반짝이는 빛일 지도 모른다. 요한은 별일 아니라는 듯 남의 다음 행동을 예언해 버렸다. 그러고 보니 나의 엄마도 종종 날카로운 예언자가 되곤 한다. 언젠가 자고 있는 아빠의 머리 왼편에 베개를 놓아둔 적이 있다. 내가 왜 베개를 거기에 두었느냐 묻자 엄마가 말했다. 아빠는 곧 왼쪽으로 돌아 누울 거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예언은 적중했다.
그래봐야 저녁이 되면 아내의 기분이 풀릴 거라는 것, 얼마 뒤 남편이 왼쪽으로 돌아 누울 거라는 것. 일상에서 마주하는 통찰의 순간은 짧고 보잘것없지만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숱한 실패와 마찰을 겪었을 게 분명하다. 때때로 무언가 이루어낸 것에 감탄하고는 하지만 사실 더 경이로운 건 그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지나온 시간들이다. 무엇을 견뎌야 했고 포기해야 했는지 한 사람과 오래 살아보지 못한 내가 추측조차 못할 일들이다.
남은 아침에 벌어진 신경전을 잊은 사람처럼 보인다. 부처 앞에서 마음에 남은 찌꺼기를 다 버리고 왔다며 홀가분한 표정을 짓는다. 두 사람은 매년 빅부다데이 아침마다 신경전을 벌인다.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결과가 바뀐 적이 없지만 남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함께 산다는 건 무언가 포기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내어주는 건 아닌가 보다.
한참 수다 떨던 남이 부엌으로 향한다. 이윽고 생강 냄새가 새어 나온다. 요한은 자기 전에 생강차를 마신다. 보통은 요한이 직접 차를 우리지만 빅부다데이 저녁에는 남이 찻물을 끓인다. 생강 우린 물에서 달콤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요한은 코로 연기를 들이마시고 한 모금 맛을 본다. 마침내 아무 일 없는 어제와 별일 많은 오늘의 밤이 닮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