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진실에 닿았을 때마지막 인사를 했다 3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집 앞 오솔길에 난 수풀은 엑센트의 사이드미러가 아스라이 스칠 정도만 자란다. 바퀴가 지나는 땅에 풀이 자라지 않는다.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 자동차는 길에 자기 역사를 쓴다.
오솔길을 빠져나가면 곧장 그 집으로 간다. 매일 아침 지나는 길이므로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일이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나도 이 길 위에 작게나마 흔적을 남길 것이다. 두 집안 사이에 벌어진 일을 알아내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상대방이 먼저 말해주지 않는 것을 물어볼 때 심장이 평소보다 무거워진다고 느낀다. 내어놓지 않은 진실을 파고드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때마침 이반이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보다 좋은 명분은 없다. 이유도 모른 채 험담을 듣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가만히 내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차 안의 공기를 내 것으로 바꿀 생각에 가득 차버리자 이반의 목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았다.
저것 봐! 사슴이야!
어?
사슴이라고!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차는 공터에 멈춰 있었다. 이반이 몇 번이나 사슴이 나타났다는 말을 했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사슴이 놀라지 않도록 시동을 끄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쪽을 보고 있어.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눈치챘을 거야.
수풀 사이로 대가리만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사슴은 내게 꽤나 익숙한 동물이다. 할아버지가 사슴 농장을 했고 시골집에서 잘 때마다 사슴 울음소리에 새벽잠을 설친 적이 많다. 동물의 세계에서 보는 사슴은 마치 약자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근육 덩어리라는 것도 잘 안다. 내게 사슴은 기괴한 울음소리와 사람 키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진 무서운 동물이다.
예쁘지 않아?
절대 놀라게 하면 안 돼!
나는 숨을 더 죽이며 말했다. 그러자 이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눈 좀 봐. 크고 동그란 게 귀엽잖아.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사슴의 눈은 내가 아는 가장 깊고 어두운 암흑이다. 커다란 구멍 안에 눈동자가 가득 차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날뛰는 걸 본 적이 있다. 순식간에 울음소리가 숲에 공명하는데 마치 몇 사람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 같다. 우리는 계속 사슴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슬쩍 귀를 막았다.
시동을 걸자 사슴은 곧장 어디론가 뛰어갔다. 숲으로 사라진 뒤에야 손을 귀에서 뗐다. 이반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구태여 사슴 농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진실을 갖고 살기 마련이고 모든 걸 말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구구절절 설명하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모자랐다. 이윽고 그 집 앞에 도착했다.
나는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이반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는 투덜거리며 걸어갔다. 그 순간 묻고 싶었던 것을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진실을 내어 주지 않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별 거 아닌 일이라 여길 수도 있고, 설명하기 싫은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진실은 마음과 때와 장소가 맞아떨어지는 어느 날 갑자기 도래한다. 만약 내가 이곳에 오랫동안 산다면 차근차근 알아갈 사실들이다. 우리의 시간은 아직 그만큼 쌓이지 않았다.
사슴이 한 번 더 우리 눈앞에 나타나면 그에게 사슴 농장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다. 내가 떠나는 날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면 묻어버릴 진실이다. 만약 내가 떠나기 전에 이반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하지 않은 질문의 답을 들을 수 있겠지. 누군가와 친구가 되려면 서로의 조그마한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오랜 시간 곁에 머물러야 한다.
별안간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무 시시콜콜해서 다른 이에게 말하기도 민망한 진실에 어느새 다가서버린 친구들. 누구는 두부를 못 먹고 누구는 손톱이 작아 콜라 캔을 잘 따지 못한다. 몇 년에 걸쳐 다가선 진실은 이런 것들이었다. 이내 어깨에 힘이 풀렸다. 한숨을 크게 내어 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걔들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집으로 돌아가는 오솔길에 들어섰다. 풀이 자라지 않는 땅과 도로를 넘지 않는 나뭇가지가 이 자동차가 지나온 시간을 친절하게도 설명한다. 자동차의 역사는 길 위에 쓰인다. 가만히 나의 역사는 어디에 길을 내고 있나 생각했다. 그 순간 다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이름들이 펼쳐졌다. 나에 관한 하찮은 진실에 다가선 이들. 사람의 역사는 곁에 머무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쓰이는 것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