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학의 독자성은 심이나 수양이 아닌 정(情)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퇴계 철학의 독자성은 심(心)이나 수양이 아닌 정(情)에서 드러난다.
퇴계 철학의 독자성은 심(心)이나 수양이 아닌 정(情)에서 드러난다.
조선의 대유학자 퇴계 이황(1501-1570)은 <전습록 논변> 등을 통해서 양명의 심학(心學)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맹자는 일찍이 심(마음)이란 생각하는 기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생각은 틀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자주 말이지요. 마음 자체는 마음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맹자는 생각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을 우리의 본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본성에 부합하는 생각을 선한 생각이라 하고, 본성에 어긋나는 생각을 나쁜 생각이라고 합니다. "저 친구, 물건을 훔치려 하다니. 생각이 틀려먹었네."라고 말하지요? 생각은 틀려먹을 수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의 틀려먹음을 무엇으로 판별하지요? 바로 인간 본성으로 판별하는 것입니다. 도둑질이 나쁜 것은 그것이 인간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남송의 대유학자인 주자는 성선설을 성즉리(性卽理)라고 달리 표현했습니다. 퇴계는 주자의 성즉리 사상을 충실히 계승한 성리학자입니다. 그 때문에 왕양명의 심즉리를 매섭게 비판헀지요. 왜냐하면 심은 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쁜 마음도 있는데 그러면 리가 나쁘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나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선한 기준이지요. 이 때문에 왕양명의 심즉리는 틀린 것입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탁상공론을 한 것 같아 보여도, 그들의 학문이 오늘날 쉽게 비웃을 정도로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들어서 퇴계의 성리학을 심학으로 지칭하는 분위기가 갈수록 강해지고 있습니다. 퇴계 본인이 절대 인정하지 않을 심학이라는 명칭이 어째서 퇴계의 학문에 자꾸 적용될까요? 제가 보기에는 여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동양철학자들은 민족주의에 강하게 젖어 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 모든 분야가 그러하지요. 하지만 조선철학의 경우에는 특히 심합니다. 그들에게는 중국철학과 구별되는 '한국철학'을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중국철학과 한국철학이 진짜로 그렇게 또렷이 구별되는가는 그들의 관심사항이 아닙니다. 어찌되었든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퇴계와 율곡 본인은 자신들이 주자와 다른 독특한 학문을 한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학들은 퇴계와 율곡을 주자와 구분하려고 안간힘을 쓰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제가 보기에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첫째, 그들은 퇴계와 주자를 수양의 측면에서 구분하려고 합니다. 퇴계는 주자에 비해서 수양을 더욱 강조하였고, 그 근간에는 마음 수양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틀린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퇴계 본인이 주자보다 "더욱" 수양을 강조하였다는 문헌적 근거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퇴계는 물론 수양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주자 또한 수양을 강조했습니다. 수양의 측면에 있어서 퇴계와 주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퇴계는 주자보다 수양을 강조했다는 민족주의 프레임이 이미 철저히 굳어져 버렸기 때문에, 21세기에 조선성리학을 배우는 이들은 그것이 진리가 아닌 프레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알아채기 힘듭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수양'의 측면에서 볼 때 퇴계가 주자보다 더욱 뭔가를 했다거나 특별한 뭔가를 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퇴계가 수양을 강조헀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들고 오는 자료들은 죄다 주자가 이미 했던 말을 퇴계가 제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양 이야기를 할 때, 퇴계는 주자의 말씀을 예로 들어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합니다. 어디에서 퇴계가 주자가 미처 못한 수양을 말한다는 것인가요?
둘째, 그들은 퇴계와 주자를 심의 측면에서 구분하려고 합니다. 이 또한 어불성설입니다. 물론 퇴계는 심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주자 또한 심을 강조합니다. 심과 관련해서도 주자와 퇴계는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수양을 강조하는 연구자들은 기어코 퇴계가 주자보다 "더욱" 심을 강조했으며, 퇴계가 말하는 '심'은 주자가 말하는 '심'에 비해 뭔가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거나 중요한 위치에 놓인다고 주장합니다. 이 모두 근거없는 이야기입니다. '심'이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퇴계가 주자가 한 말 외에 특별히 덧붙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또한 민족주의에 바탕하여 독자적인 한국철학을 세우려는 조바심이 눈 앞을 가려 진리를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 참사입니다.
그렇다면 퇴계가 이룬 여러 업적 가운데 주자가 미처 해내지 못한 특별한 것들이 있는가요? 물론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독자들이 학창 시절 배웠던 "사단칠정논변"이 바로 그러합니다. 많은 퇴계학 연구자들은 사단칠정논변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살펴주었으면 합니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의 구분으로, 그리고 스피노자는 감정의 능동과 수동의 구분으로 세계 철학의 맨 앞자리에 앉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사단칠정논변이야말로 세계철학사상 일대 사건입니다. 만일 퇴계학 연구자들이 퇴계가 사단칠정논변만을 가지고서도 주자가 생각지도 못한 미답지를 밟았고 주자를 아득히 앞서갔다는 점을 제대로 깨우쳤다면, 퇴계 심학이니 하는 용어를 지어낼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퇴계의 "사단칠정"은 선현이 미처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퇴계의 만년 대표작인 <성학십도> 에서도 퇴계 유일의 창작이라 할 것은 <심통성정도>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심통성정도>의 핵심은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지요.
퇴계 심학을 논하는 이들은 퇴계 학문의 엑기스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굳이 기어코 퇴계학과 주자학을 구분하고 싶다면, 그들은 퇴계 심학 대신 퇴계 정학(情學)이라는 표현을 써야 합니다.
주자학은 리학(理學), 퇴계학은 정학, 양명학은 심학 이렇게 되어야 세 학문의 차이점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수양? 주자와 퇴계가 차이가 없습니다. 심? 주자와 퇴계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 물론 주자도 정을 말합니다. 하지만 사단은 리발기수(理發氣隨)요 칠정은 기발리승(氣發理乘)이라는 퇴계의 정의는 주자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바입니다.
퇴계는 주자학자이므로 퇴계학 또한 리학이라고 불리는 것이 가장 온당합니다. 퇴계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퇴계학을 주자학과 구분하려 해도, 퇴계 심학은 안됩니다. 만약 퇴계학이 퇴계 심학이라면, 주자학도 주자 심학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주자 심학이란 표현은 쓰지 않지요. 그런데 어째서 그렇습니까? 논의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든 쓰지 않든 이미 퇴계학계는 퇴계 심학이라는 전제를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퇴계를 전공한 유학자로서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학계의 거두들과 주류 교수들에게 퇴계 심학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젊은 학자들은 앞에서는 긍정하는척하지만, 뒤에서는 "퇴계가 주자랑 다를 게 뭐 있어? 심? 수양? 그거 주자도 다 얘기했는데? 괜히 한국유학의 독창성에 연연하다 보니, 이상한 결론을 내리는 거 아냐? 하지만 이미 답을 정해놓았는데, 토론해 봐야 뭐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존 학계에 대한 불신은 갈수록 높아지고, 젊은 인재들은 아예 유학을 가거나 석사까지만 하고 이 분야를 떠나지요. 저는 앞에서조차 긍정하지를 못하는 성격이라, 더욱 입장이 애매한 사람이고요. 하지만 젊은 학자들은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딱 봐서 아닌 거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지요. 오늘날 동양철학계에 젊은 학자들이 몰리지 않는 까닭이 과연 생계 문제 때문일까요? 정말 답답한 추석 전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