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삼포 세대 오포(悟布)씨의 하루 (4)

이토록 넓은 홍대 구역 가운데 어디 하나도 마음 편히 머물 곳이 오포에게는 없었다. 그리고 약속 시간인 7시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았다. 오포는 결국 홍대 부근을 한참 벗어난 끝에, 상수역 인근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허름한 맥주 가게를 찾아내어 숨어들었다. 마치 탄내가 배어 있을 것만 같은 시커먼 목재들이 얼기설기 얽힌 맥주 가게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 혼자서 맥주잔을 닦으며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긴 머리를 뒤로 묶고 동그란 안경을 쓴 그녀는 30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꼿꼿하고 날씬한 몸매에 청색 멜빵바지가 매우 잘 어울렸다. 게리 무어(Gary Moore)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의 초창기 연주가 나른하게 울려 퍼지는 좁은 가게 안은 한겨울임을 잊게 해 줄 정도로 따뜻하고 아늑했다. 테이블 2개와 바(bar)만 있는 좁다란 푸른빛 가게 안을 잠시 둘러본 뒤, 오포는 버드와이저를 주문하고 바에 턱을 괴고 앉아 조용히 예비대학생의 행복에 관해 곱씹어보았다.

“아니, 토요일 낮,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데이트도 안 하세요? 어찌 멀쩡하게 생기신 젊은 양반이 이렇게 혼자서 음침한 가게를 다 찾아오셨을까? 뭐, 저야 심심하지 않아서 좋지만.”

주인이 새우깡과 버드와이저를 오포 앞으로 밀며 편안하게 농을 걸었다.

“말도 마세요.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데이트 기회를 발로 차 버린 뒤, 멍청한 꼴로 어디 숨을 곳을 찾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니까요. 그런데 주말에 이렇게 손님이 없어서 어떻게 해요?”

“하하, 원래 저녁 무렵에 오픈해서 밤새 하는 가게인지라 원래 이 시간에 손님 받지 않는데, 혼자 있으니 심심하기도 하고 그래서 손님을 들였지요. 데이트 기회를 차 버린 건 유감이네요. 연애하면 행복해서 좋은데 말이죠.”

“그런데 그게 말이죠, 정말로 연애를 해야만 반드시 행복한가요? 바보 같은 질문인 걸 저도 알아요. 심지어 저도 예전에 여자를 사귀어 보았고요. 하지만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연애하지 않아도 만족하고 행복한 친구들 또한 얼마든지 있잖아요. 제 나이를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삼포 세대에 속하거든요. 연애와 결혼, 출산을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포기한 세대지요. 그런데 제 친구들 가운데는 행복한 절식남도 있거든요. 이른바 연애에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도 진정 행복을 느끼는 친구들 말이죠. 그래서 저는 무척이나 헷갈려요.”

“이야, 이거 원.” 여주인은 갑자기 오른손으로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린 뒤, 흥미롭다는 듯이 오포를 쳐다보고선 저쪽으로 가더니 맥주를 손수 따서 가져왔다. “아직 오픈하려면 시간이 꽤 남았으니, 나도 술 한 잔 하죠, 뭐. 요새 이렇게 진지한 사람도 다 있네.”

멜빵바지 속 체크무늬 난방을 팔꿈치까지 동동 걷어 올린 그녀와 오포는 크게 소리 내어 잔을 부딪치고선, 단숨에 바닥까지 비워버렸다.

“카, 시원하다!” 그녀는 선머슴처럼 손등으로 입술을 쓱 훔친 뒤, 안경 너머 반짝이는 눈으로 오포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자랑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지만, 제 얘기만 짧게 할게요. 제가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다소 부족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하고선 그는 정말로 선했고, 심지어 성실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마침내 제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그는 매우 두려워했어요. 저는 그가 무서워한 이유를 지금까지 알지 못해요. 물론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아무 여자나 집적대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저와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지금 이 술집을 저와 함께 차렸지요. 그러나 결혼식을 올리기 며칠 전 그는 결국 ‘아직 가장이 될 자신이 없다’는 편지를 남기고 저와 아이를 버려둔 채 어디론가 사라져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저희 모녀는 이른바 ‘바람맞은’ 거죠. 가게를 차리느라 잔뜩 진 빚만 제게 안기고서 그는 그렇게 떠나갔어요.”

“어휴, 상심이 꽤 크시겠어요. 원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신가요?”

“처음에는 그랬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미움도 사라지고, 이제는 그가 어디 있든 몸 건강히 지내길 바랄 뿐이죠. 물론 그가 돌아와서 다시 우리 모녀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길 저는 바래요. 저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거든요.”

“이야, 정말 믿기 어렵네요. 아직도 그를 사랑하다니.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다소 불행하지 않으세요?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들고, 게다가 빚까지 지고 계시잖아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물론 빚을 갚는 것은 힘들죠. 제가 일하는 동안에는 엄마가 애를 봐주고 계시지만, 엄마나 저나 힘들긴 마찬가지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행복해요. 저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아요. 아이도, 그 이도. 그리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지금 연애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모정(母情)으로, 노모를 모시는 딸의 심정으로 행복해요. 연애 여부에 관계없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자기 삶에 만족하면 그게 행복인 거죠. 뭐, 책에서 배운 건 아니고 그냥 경험상 그래요.” 오포는 안경 너머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거짓말을 일삼지 않는 그녀의 눈빛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노모를 모시는 딸의 심정’이란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잠시 집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리기도 했다. 오포는 7시가 다 되어 그를 찾는 친구들의 전화가 걸려올 때까지 바에 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맥주잔을 기울이며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보기 드물게 솔직한 그녀와 계속 같이 있고 싶었지만, 선약을 어길 수 없어 그녀에게 꼭 다시 찾아올 것을 약속하며, 오포는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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