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포가 약속 장소인 <삼거리 포차>에 도착하니, 준태와 동우는 아직도 가게 밖에서 줄을 서며 기다리고 있었다.
“얼씨구, 오포가 웬일이니? 약속 하나는 칼같이 지키던 애가 지각을 다하고, 게다가 낮술까지 먹고 왔네. 기껏 취업 1년 안됐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 친구. 요새 졸업하고 바로 취직하는 애들이 드문 예지. 아직 너나 우리나 최종 발표가 나지 않은 몇 군데가 더 있잖아. 기운 내라고!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오늘 밤만큼은 새하얗게 불태워야 하지 않겠냐!” 항상 활기가 넘치는 경상도 친구 준태가 오포의 어깨를 세게 후려치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서울 샌님 같은 동우는 “야, 우리들 같은 솔로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칩거해야 하는데, 어쩌자고 모인 걸까. 게다가 남자들끼리 모여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불태우자는 말 따위를 제발 큰 목소리로 누구나 듣게 외치지 마. 부끄러워 죽겠네.”라며 투덜댔다.
“야,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이렇게 줄을 다 서냐? 요새 불황이다 하는데, 그거 다 뭔가 잘 모르는 사람들 얘기인걸? 장사 잘 되는 곳은 엄청 붐비네.” 오포는 칼바람에 술기운이 싹 가심을 느끼면서 추위로 입술을 덜덜 떨며 말했다.
“여기가 이른바 90년대 콘셉트의 술집이거든. 실내 장식도 그렇거니와, 음악도 90년대 댄스 뮤직이 주를 이루지. 게다가 즉석만남도 아주 활발해. 물론 우리 모두를 위한 즉석만남이지.”
그런 준태에게 동우가 눈을 흘겼다. “준태야, 90년대 음악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가게 안에 앉아 있는 여성분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거란 꿈도 꾸지 마라. 이제 그런 근자감은 버릴 때도 되지 않았니?”
“아니, 도대체 취업 좀 안된다고 왜들 그렇게 기가 죽었대? 우리 원래 그런 사람들 아니잖아! 힘내, 힘내라고! ‘용자가 미인을 쟁취한다’는 말도 몰라?”
“우리 원래 그런 사람들 맞아. 우리가 뭐 여성분들께 들이대서 성공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니? 여하튼 <삼거리 포차> 하니까 왠지 삼포 세대인 우리와 딱 들어맞는 것 같아서 흥미가 돋네. 어, 이제 우리 차례다. 네, 3명이요. 신분증 여기 있어요.”
앞선 맥주 가게가 진한 흑갈색의 목재로 꾸며졌다면, <삼거리 포차>는 한층 밝은 빛의 목재들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90년대라기보다는 차라리 개화기에 볼 수 있었던 여러 가게의 모습들로 벽면이 장식되어 있었고, 메뉴판에는 궁서체로 각종 음식 및 주류가 가득히 적혀 있었다.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빠른 리듬의 90년대 댄스 뮤직 대신 80년대 발라드가 흘러나와 따뜻하고 정감 있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본 오포는 경악했다.
“야, 이거 백수들이 놀기에는 너무 비싼 가게 들어온 거 아냐? 소주 값이 너무 사악한데? 우리 나갈까?”
“아니, 오포 너는 과외하면서 돈도 제법 벌고 있잖아? 왜 그렇게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거야? 우리가 항상 이런 곳에 오는 건 아니잖아. 연말에 기분 한 번 냅시다. 뭐, 다른 가게와 크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구먼. 게다가 여기는 물이 좋잖아, 물이. 분위기 값도 생각하셔야지요.” 흥분한 준태의 격정적인 대꾸에 동우도 동조했다.
“어차피 다른 가게 가도 지금은 자리 없어.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잖아. 겨우 힘들게 자리 잡았는데, 여기서 일단 마시고 2차는 다른 장소로 이동하자. 너무 추워서 돌아다닐 엄두가 안 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동우의 눈 또한 어느새 재빠르게 주변 테이블을 탐색하고 있었다. 주문한 소주와 어묵탕이 나오자마자, 친구 셋은 잔을 가득 채우고 직장인들처럼 ‘위하여!’를 외치며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키야, 좋다! 바로 이거지, 이거야. 자, 친구들 한 잔 더 받게. 정말 난 너희들과 함께 있어 너무 행복하다.”
항상 호탕한 준태는 아저씨 포스를 내며 잔을 채웠고, 세 명의 솔로들은 그런 식으로 소주 4병을 비우며 어묵탕을 퍼마셨다. 헌팅을 외치던 준태는 어느새 헌팅 따위는 까맣게 잊고서, 행복한 표정으로 구부정하게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얹고서 흐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다. 술이 약한 오포는 토마토처럼 벌게져서 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잔뜩 준 채 여전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흘러가는 시간도 서로 간의 대화도 잊은 채 한 동안 분위기에 취해 있던 친구들을 바라보며 동우가 말문을 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