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 대학 축제 가다 (1)

또 다른 일상, 또 다른 여행

여덟 시간의 강의와 1시간의 면담을 마치고 녹초가 된 비정규직 시간강사의 무거운 발걸음은 혜화 역에 내리자마자 점점 날개를 단 듯 가벼워지기 시작합니다. 전공 서적이 잔뜩 든 가방을 메고서 도저히 4번 출구에서부터 연구실까지 걸어 올라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흥겨움에 들떠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니 저도 내친김에 그들과 함께 성균관대 정문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주 화요일은 제게 가장 보람차지만 동시에 체력적으로 힘든 날이기도 합니다. 하루 8시간의 강의 시간도 짧지 않거니와, 산더미 같은 가방을 멘 채 4호선 -> 2호선 -> 분당선 -> 버스로 이어지는 출근길, 그리고 코스를 되짚어오는 퇴근길은 사람을 몹시나 지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화요일 저녁이면 가급적 제가 학위를 받은 곳이자 집 근처인 성균관대를 찾아, 후배들과 술 한 잔 하고 기분 좋게 헤어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주어진 삶에 불평을 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학교 축제'라는 단어만 들어도 여전히 가슴이 설레고, 축제 한편에 슬그머니 섞여 사람들과 같이 술 마시고 같이 뛰고 노는 것이 아직도 좋은 저는 직장 생활이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직장 생활이 맞지도 않는데다 남들이 보기에 굶어 죽기 딱 좋은 인문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경제적으로 고생스럽지 않기를 바랄 만큼 제가 철이 없지는 않습니다. 놀기를 좋아하는 것과 철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니까요.

저는 부족하나마 제 능력껏 열심히 일하고, 그것으로부터 들어오는 보잘것없는 수입에도 감사하면서 어떻게든 그 안에서 최대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려 매일 궁리합니다. 독서도 즐겁지만, 독서를 하루 종일 할 수는 없습니다. 눈도 아프고 허리 생각도 해야 하니까요. 그러면 그때는 또 다른 즐거움을 만끽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가파른 성균관대 언덕을 낑낑거리며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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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닌 등산 중인 제 왼편으로 이미 후끈 달아오른 축제 현장이 다가옵니다. 작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늘은 윤도현 밴드와 박재범이 온다 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습니다. 저 또한 흥이 가득 올라 혼잣말합니다. '연구실에 있는 후배들을 불러 내려야겠구먼. 주점에서 술 한 잔 하면서 회포를 풀어야겠어.' 하지만 메인 스테이지가 아닌, 경영관 앞에 마련된 주점에 눈을 돌린 저는 경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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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습니다. 저녁 8시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주점은 가득 찼습니다. 후배들을 불러 내는 것은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한 저는 교수회관으로 발을 옮겨, 4층 연구실로 향합니다. 문을 여니,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 면접을 무사히 마친 석사 후배, 그리고 박사 과정의 후배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저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아! 제가 술을 사 오지 않았군요! 그러고 보니 저는 저녁도 먹지 못했습니다. 후배들을 이끌고 서둘러 교내를 벗어나 가까운 편의점에 들러 맥주 4캔과 가벼운 안주 몇 개를 집어 들고 다시 연구실에 듭니다. 그리고 연구실 창문을 활짝 열여 박재점과 윤도현 밴드의 음악, 환호하는 젊음의 목소리를 만끽하며 시끌벅적하고도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정답게 술을 마십니다. 세상 어디에 있는 것보다 행복했습니다.

나이가 드니, 여행은 어디로 가는 것보다는 누구와 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여행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1년에 홍콩을 4번씩 여행하는 친구도 10년 동안 대학 축제를 한 번도 가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대학 축제가 오히려 훨씬 그에겐 낯설고 신기하겠지요. 저는 대학 축제에 오는 것도 얼마든지 즐거운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여행이란 일상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제 일상과 이어진 또 다른 일상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자! 후배들과 속마음을 충분히 나누었으니, 이제 각지에서 모인 젊은이들과 흥을 나눌 때가 아닌가 합니다. 박재범은 일찍 갔고, 그를 사랑하는 어린 팬들도 귀가했습니다. 이제 고전적인 대학 캠퍼스 분위기에 가장 어울리는 윤도현 밴드가 연주 중이니, 어찌 그쪽으로 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여, 후배들과 함께 연구실을 나서서 축제 현장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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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관 앞 주점은 여전히 붐비는군요. 저 곳에 자리를 잡기란 불가능한 듯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무대 앞 쪽으로 내려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박재범의 팬들이 빠진 뒤에는 그래도 저희들이 설 공간은 확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적어도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러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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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전혀 빈 곳이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막상 가보면 항상 틈이 있게 마련입니다. 저희들은 거의 무대 앞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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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조명 자체는 마치 신해철이 대학가요제에서 '그대에게'를 부를 때 쏟아졌던 바로 그 빛과 유사하더군요. 저와 같은 '응답하라 1997' 세대에게는 아주 제격이었습니다. 일단 축제 속에 뛰어들면 사진을 찍기보다는 축제 자체를 즐겨야죠. 윤도현 밴드가 퇴장한 뒤 DJ들이 나와서 애프터 파티를 진행했는데, 사실 저희들은 이때가 더욱 신났습니다. 그러나 내일 아침에 일이 있는 저는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좋고 내일도 좋아야 하는 것이 인생인데, 오늘만 좋자고 내일을 망칠 수는 없으니까요. 아쉽기도 하지만... 흠... 목요일 밤에 다시 학교 축제에서 모이기로 합니다. 축제는 마지막 날이 장관이죠. 목요일에도 강의 여럿이 있는지라 아마 파김치가 되어 혜화 역에 도착하겠지만, 오늘처럼 또 부활하겠지요. 목요일을 생각하니, 정문까지 걸어내려가는 발걸음이 그다지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희를 지나치는 다른 사람들의 발걸음 또한 그러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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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균관대 근처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고, 이번에 박사 면접을 본 후배 또한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짧게나마 클러빙을 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뒤풀이가 따라야 하는 법이죠. 그래서 지난주에 오픈한 마라탕 가게를 방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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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정문 근처 맥도날드 옆에 자리한 마라탕 전문점인데, 정말로 제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새벽 2시까지 가게 문을 열기에, 늦게나마 마라탕 한 그릇을 안주 삼아 아래와 같이 술 한 잔 하며 하루를 끝내기에 제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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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사리를 2인분 넣으면, 사실 식사량이 그다지 많지 않은 두 사람의 한 끼가 될 정도입니다. 저도 위가 쪼그만 편이라, 이런 방식으로 먹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마라탕에 넣을 식재료를 저희가 직접 고를 수 있기 때문에, 한 그릇에 얼마~ 이런 설명은 의미가 없습니다. 식재료를 다 골라 건네주었더니 7천 원이 나왔습니다. 소주 한 병에 3천 원이니, 딱 만 원이 들었네요. 이렇게 우리의 즐거운 여행은 마라탕 가게로 장소를 옮겨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이어집니다... 만 원의 행복...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흔히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이 그렇게 대단하거나 거창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20대에 또는 30대에 혹은 그 이상의 어떤 카테고리 안에 가두는 순간, 본인의 삶의 영역도 좁아지지만 동시에 그 영역에 구속받지 않는 타인을 바난 하기 일쑤입니다. 본인의 삶이 빈곤해지는 것이야 본인이 자초한 불행이라 하지만, 잘 살고 있는 타인은 어쩌다가 철없다는 비난을 사야 할까요? 칸트나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카테고라이제이션에 자신을 얽매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저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논어> <향당편>에 보면 공자(孔子)는 주량이 끝이 없으시되,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으셨다(唯酒無量不及亂)고 합니다. 참으로 괜찮은 양반 아닙니까? 성균관대 출신이면 이를 본받아 이제 어지러움에 이르기 전에 술잔을 놓아야 하겠지요. 술잔이 나를 놓기 전에 말입니다.

후배와 함께 걸어가는 밤길이 너무나 좋습니다. 이만하면 제법 '운수 좋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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