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중얼거리며 L백화점과 L마트를 잇는 건물 통로로 발을 옮기던 오포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친형이 아내와 함께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며 오포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때마침 토요일인지라, 형은 출근하지 않고 가족과 나들이를 즐기는 모양이었다. 몇 년째 원했으나 들어서지 않던 첫 아이를 얼마 전에 출산한 형수 또한 몹시도 행복해 보였다.
“오포야, 백화점에 일 있어서 왔니? 마침 잘 되었다. 나도 백화점 방문했다가 너랑 어머니 보러 집에 들를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마주치지 않았다면, 너를 못 보고 돌아갈 뻔했구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혹시 별 약속 없으면 우리랑 같이 점심 먹자. 그리고 시간이 넉넉하다면, 내가 옷이라도 한 벌 사주고 싶은데. 그동안 형이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너무 바빴거든.” 어릴 적부터 항상 오포를 챙기고 그의 학업 성적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형은 늘 그랬듯이 오포에게 따뜻한 말과 손길을 건네었다. 오포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병으로 세상을 떴으며, 오포와 무려 20살 차이가 나는 형은 그에게 항상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래요, 바쁘지 않으시면 저희랑 함께 식사하세요.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뭐든 말씀하세요. 저도 매일 집에서 애만 보다가 오랜만에 외출하니, 식욕이 막 당기네요.” 출산 뒤에 살이 빠지지 않아 몸매가 예전 같지 않다며 고민 중인 형수가 식욕이 당긴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니, 오포는 아무런 꾸밈없는 그 말이 오히려 거짓말 같았다.
“형, 나도 점심 약속이 있어서 나왔거든. 백화점에 잠시 들렀다가 이제 지하철 타고 홍대로 이동해야 해. 이미 좀 늦은 것 같아. 형수, 오랜만에 만났는데 정말 죄송해요. 형 생일이 다음 달이니, 그때 제가 댁으로 찾아갈게요. 그때 정말 맛난 거 먹어요. 다음에 봐요.”
차마 점심을 혼자서 해결했다고 말하지 못하고 선약이 있다며 서두는 오포를 형 내외는 붙잡지 못했다. 형수는 울기 시작하는 아기의 입을 닦아주기 위해 손수건을 꺼내며 다음과 같이 작별인사를 건네었다.
“네, 다음 달에 우리 꼭 같이 봐요. 그리고 항상 기운내고 행복하세요.”
“네, 형수 고마워요. 형, 다음에 연락할게. 오늘 즐거운 나들이되길.”
오포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방실방실 웃기 시작하는 조카의 볼을 꼬집고 이마에 입맞춤한 뒤, 뒷걸음질 치며 손을 흔들고선 지하철역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는 한없이 착한 형 내외가 자기 속을 꿰뚫어본 것만 같아 매우 곤혹스러웠다.
‘행복하세요라니. 설마 나를 놀리는 건가. 지원했던 회사마다 죄다 나를 거절하는 판국인데, 어떻게 내가 행복할 수 있겠어. 취업을 하지 못한 내가 어떻게 기쁠 수가 있냐고.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 소원한다고 해서 곧바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잖아. 그럴 거면 왜 사람들이 불행으로 인해 자살하겠어?’
그러나 교통카드를 지하철 입장 구에다 화난 듯 내리치고서 계단을 내려가다, 오포는 잠시 발길을 멈추고 생각했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자. 저 착한 형수가 내게 어떤 악의를 갖고 비꼴 리가 있나. 형수는 진심으로 내 행복을 빌었을 따름이다. 그렇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행복이다. 그런데 과연 취업을 하면 그로써 행복해지는 걸까? 다른 모든 조건들이 동일했을 때, 과연 취업을 한 사람은 취업을 하지 못한 사람보다 무조건 행복한 것일까?’ “여봐요, 계단에 서서 뭐하는 겁니까? 아까부터 비키라고 말했는데, 못 들었어요? 젊은 사람이 귀가 꽉 막히기라도 했나.”
정신이 번쩍 든 오포가 고개를 돌려 보니, 자전거를 어깨에 멘 중년의 남성이 그의 뒤에서 퉁명스레 소리치고 있었다. 자전거를 들쳐 멘 상태에서 사람들을 피해 계단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내려오기 어려운 탓에, 아마도 그의 앞을 막고 선 오포에게 계속 비키라고 요청했던 모양이다. 오포는 서둘러 그에게 사과한 뒤, 때마침 진입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출구 앞에 섰다. ‘귀가 막혔다? 그러고 보니, 귀지를 파지 않은지 한참 되었군. 귀가하면 반드시 귀 청소를 해야겠어.’
주말 라이딩을 즐기러 나온 어른의 호통으로 인해 잠시 끊겼던 생각의 끈을 다시 이으려고, 오포는 지하철에 선 채 계속 미간을 찡그리며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대각선으로 11시 방향에 앉아 있는 어린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오포는 그녀가 다름 아닌 옆집 예비대학생임을 알아보았다.
“아.” 짧은 탄식, 그리고 미소와 함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포의 옆에 섰다. 오포는 뭐라도 잘못한 것 마냥 얼굴이 벌게져서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선배님, 오늘 벌써 두 번째 뵙네요.” 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입술에서 마치 노래처럼 ‘ 두 번째’라는 말이 흘러나왔을 때, 오포는 왠지 좋은 감정을 애써 억누르기 위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시는지 여쭤 봐도 돼요?”
“아,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홍대에 갑니다.”
그냥 홍대에 간다고 말해도 될 것을, 구태여 ‘친구와 약속이 있어’라는 말을 덧붙인 까닭을 오포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홍대에 가는 길이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오포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면서도 한편으론 도망치고 싶다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친구들과 오늘 홍대에서 저녁 먹고 신나게 놀기로 했어요. 아직 개학하려면 몇 달 남았지만, 학교 갈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너무 행복해요.”
오포는 도대체 학교에 가는 것이 어찌 그리 행복하냐며 직설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그녀의 크나큰 행복감을 흔드는 질문은 큰 죄악에 해당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포는 질문 방식을 바꾸었다.
“학교에 가서 이것저것 해 볼 생각하니까, 너무 행복하시죠?”
“네. 물론 친구들과 술 마시고 놀러 다니는 것도 좋지만, 저는 어릴 적부터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아동복지에 관심을 키웠거든요. 그래서 사회복지학과를 지원했는데, 합격해서 그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어 너무 행복해요.”
오포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나머지 하마터면 ‘우리 같이 애를 만들어서, 그 아동의 복지에 신경 써 보는 건 어때요?’라고 말을 건넬 뻔했다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아니, 나는 어찌 이리 쓰레기 같은 놈일까.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도 못한 어린애, 그것도 전혀 알지 못하는 여성에게 이 따위 한심한 농담을 지껄일 생각이나 떠올리다니!’
취업준비를 하느라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인 탓에 남의 이야기를 듣는 데 익숙하지 않은 오포가 제멋대로 자책을 늘어놓는 동안에, 그녀는 자기가 아동복지에 관심을 갖게 된 사연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들이 지하철에 나란히 서서 앞만 보는 대신 서로를 마주 보았다면, 그녀는 아마도 넋이 나간 오포의 상태를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오포는 다음 정차역이 홍대 입구라는 방송에 정신이 번쩍 들기까지, 그녀가 털어놓은 모든 소중한 이야기들을 놓쳤다.
인산인해라는 상투적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과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면서, 그녀는 오포에게 말했다. “제가 원래 저녁때 약속이 있는데, 집에 있으려니 너무 갑갑해서 일찍 나왔거든요. 그래서 제가 옷 구경하러 다닐 예정인데, 저랑 같이 다녀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피 한 잔 살게요.”
“아, 죄송합니다. 저도 약속은 저녁때 있지만, 그 전에 또 다른 친구를 좀 만날 일이 생겨서요.”
‘아니, 이게 내 입에서 나온 말인가?’ 오포는 흠칫 놀라면서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자공(子貢)이 말했듯이, 사불급설(駟不及舌)이라 네 마리 말이 끄는 빠른 수레도 세치 혀를 따라잡지 못하는 고로, 쏟아놓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아니, 그녀가 지금 같이 있자고, 커피를 사겠다고 말했는데 네 놈이 감히 거절을 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이건 도대체 무슨 정신분열이래? 방금 말한 놈은 대체 누구냐?’
“아, 그렇구나. 바쁘신데 할 수 없죠. 그러면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분명히 아무런 사심 없이 말했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인사하고 제 갈 길을 갔다. 하지만 항상 여자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을 제멋대로 오해하는 남자는 혼자 남겨져선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원망하기 마련이다. 오포는 지하철에서 내내 그녀와 함께 있었고 심지어 그녀와 같이 쇼핑할 찬스까지 잡았으나, 결국 그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다. 더군다나 그녀에게 지금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했으니, 이제 그녀가 절대 나타나지 않을 곳을 찾아 숨어서 저녁 약속시간까지 버텨야 할 판이다.
‘대체 어딜 가야 그녀와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까. 커피숍은 너무 불안하고, 차라리 성인용품 가게인 <콘돔매니아>에 가 있을까? 아니야, 그녀가 콘돔을 사러 올 수도 있잖아. 아니, 너 지금 제정신이야? 뭐, 그녀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넌 지금 정신이 나갔어. 그나저나 어디를 가 있어야 하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