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포는 지하철 막차를 놓치고 심야버스 안에 내내 서서 시달리다 귀가한 탓에, 늦잠을 자고 11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그가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우산을 챙기라는 어머니 말에, 신발장을 뒤져 자그마한 우산 하나를 챙겨 나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취업 실패 후 어머니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죄송스러웠고, 더군다나 그는 딱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부르는데 적어도 대답은 했어야 했어. 너 자신도 알잖아. 어머니가 자식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몇 년쯤은 취업에 실패하는 세상, 너는 고작 1년 놀았을 뿐인데 어찌 그리 소심하게 구는 것이냐.’
오포는 옹졸한 자기 자신을 원망하였다. 사실 졸업하자마자 곧장 취업하는 케이스는 열에 하나를 꼽을 정도였다. 자기 친구들 또한 대부분 취업에 실패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당당하게 살아갔다. 반면에 모든 집 부모들은 행여 자식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아무 말도 못 하고서 끙끙 앓는 분위기였다. 오포는 이런 사실들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아파트 현관문을 열자마자 맞은편 집에서 나오던 예비 여대생과 마주친 탓에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 어머니께 대답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던 것이다.
요즘 대부분의 아파트 거주자들이 그렇듯이, 오포는 옆집 사람과 형식적인 인사 이외에 단 한 마디도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옆집 여고생이 오포가 다녔던 대학 근처에 있는 여자대학에 얼마 전 수시 입학했다는 사실을 엘리베이터에서 그녀와 그녀의 부모님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한껏 차려입고 나가는 것을 보니, 친구들과 약속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축하한다, 미래의 백조이자 예비실업자여! 지금이라도 마음껏 즐겨라. 너의 미래는 나의 미래보다 암울할지니.’
“안녕하세요! Y대학 다니시죠? 제가 이번에 Y대학 근처에 있는 E여대에 입학하거든요. 그래도 근처의 대학에 들어가게 되니, 왠지 선배 같은 느낌이 들어서. 혹시 앞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 제가 학교생활에 대해 모르는 것 여쭤 봐도 이상하게 생각지 마세요.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깔끔한 셔츠에서 풍기는 샤프란 향과 함께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우며 오포의 불온한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오포는 흠칫 놀라서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이 뭐라 말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는 다시 한 번 허리 굽혀 인사하고선 산뜻한 샴푸 냄새를 끌고 가벼운 걸음으로 경쾌히 복도를 먼저 나섰다.
오포는 순식간에 자괴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니, 나란 놈은 도대체 뭐가 잘못되어 이렇게 심사가 뒤틀렸을까. 저렇게 티 없이 맑은 애에게 미래의 백조라는 저주 따위나 퍼붓고 있다니. 이거, 다음번에 만나면 뭔가 따뜻한 말이라도 해주고 커피 한 잔 사야겠는걸. 아냐, 백수 주제에 누구를 또 만나서 사 먹일 생각을 하냐. 게다가 그녀는 내가 아직 대학을 다닌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 나는 이미 졸업한 지 1년이 다 된 백수인데, 부끄러워서 어디 말이나 하겠어. 취업준비생들끼리 모여서 의리나 다지는 편이 낫지.’
아니나 다를까, 그는 사실 ‘취업준비생’들끼리 저녁에 홍대에서 모여 술 한 잔 하기로 이미 약속하였다. 하지만 그는 약속시간까지 할 일이 전혀 없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커피숍에 가서 책이라도 보았겠지만, 그는 꽤나 희망을 걸고 있었던 회사로부터 거절 통지를 받은 지 며칠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가방 안에 든 책들을 거들떠보기도 싫었다. 사실 어젯밤에도 어머니가 방에 있었기 때문에 토익 교재를 펼쳤을 따름이었으며, 어머니가 방을 나서자마자 그는 책을 덮고 침대에 몸을 던졌더랬다. 그런 그가 시간이 남는다고 해서 커피숍에 들어가 책을 볼 리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점점 배가 고파와, 오포는 일단 혼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카카오톡에 친구로 등록되어 있는 여러 패스트푸드 업체들을 검색했다. M업체에서는 이번 달 내내 런치세트를 3천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고, K업체에서는 스테디셀러 햄버거를 2천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제공하고 있었다. 오포는 메고 나온 가방에 가득 찬 물병이 들어 있음을 기억하고, 집 근처에 있는 K업체의 햄버거 하나로 점심을 때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 아닌가.’ 오포는 K업체 매장에 들어가 햄버거를 단품으로 주문하며 생각했다. ‘10년 전에도 햄버거 단품 가격이 지금보다 크게 저렴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요새는 동종 업체들끼리 경쟁이 치열해서 저마다 매달 할인행사를 쏟아내고 있으니, 검색하는 수고만 조금 들이면 얼마든지 부담 없는 가격에 내가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잖아?’ 비록 아침을 굶은 터라 햄버거 하나로는 부족해 결국 동일한 단품 하나를 더 주문하고 말았지만, 오포는 자신이 꽤나 합리적이고 만족스럽게 점심을 해결했다며 다소 풀린 기분으로 가게를 나설 수 있었다.
‘배도 든든히 채웠겠다, 이제 어디를 갈까.’ 오포는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그래, 집 근처 잠실에 있는 L백화점에 가자. 아무래도 사람 많은 곳을 가야 암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사람들이 많은 곳에는 뭔가 재미있는 일들이 있게 마련이지.’
그러나 모험과 신비가 가득할 것만 같다고 오포가 꿈꾸던 그곳 L백화점에 도착해서도, 오포는 여전히 행복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한껏 화려하게 치장한 백화점 내에는 고객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안내방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오포는 그 방송을 듣고 나서도 전혀 행복해지지 않았다. ‘아, 내가 고객이 아니어서 그런가. 여기서 고객이라 함은 물건을 사기 위해 백화점을 방문한 사람을 일컫겠지. 나는 단순히 우울한 기분을 풀어볼까 하고 방문했을 따름이니, 백화점이 나 같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의무는 없지. 꽤나 정직한 백화점이 아닌가! 고객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 그의 기분을 절대 행복하게 띄워주질 않으니.’
오포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백화점의 성실함에 감탄하며, 1층 매장을 휘휘 둘러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1층 화장품 매장을 둘러보고 있었구먼. 내가 관심을 두지 않는 제품들이 가득 쌓인 곳을 걸어 다니고 있었으니, 기쁠 리가 있나. 어디, 스포츠용품 매장에나 가 볼까? 아니야, 그러고 보니 내가 내 수입에 어울리지 않는 곳을 돌아보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렇지, 바로 그거야. 나는 L백화점이 아닌 L마트를 가야 했어. 백화점에는 도대체 내 벌이로 살 수 있는 물건들이 없단 말이지. 하지만, 대형 할인마트에는 내 소득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선에서 즐길 수 있는 제품들이 잔뜩 있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렇다면 역시 백화점은 나 같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필요가 없지. 백화점을 방문해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탓에 벌 받고 있다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