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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 완성이 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완성하라!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와 같이 뛰어난 철학자의 글을 읽는 것은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익을 준다. 아렌트가 칸트나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을 때, 그녀는 단숨에 그들의 핵심을 파악하고 우리들에게 그 엑기스를 알려준다. 우리는 그와 같은 능력이 참으로 드물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를 읽는다는 것은 <리딩으로 리드하라>나 <지대넓얕> 등의 책을 통해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다.



불행히도 한나 아렌트는 마르크스주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녀의 다음과 같은 요약은 마르크스주의의 아리스토텔레스 목적론적 성격을 정확히 꿰뚫었다. "인간에 대한 것으로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우리는 완성 가능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에게서 빌려온 마르크스의 관념,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가 자기 자손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모든 낡은 사회가 자신의 미래 사회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관념은 실제로 역사상 가장 정교할 뿐만 아니라 가장 그럴듯한, 진보의 영원한 연속성에 대한 개념적 보증이다. 동시에 그러한 진보의 운동은 적대적인 강제력들의 충돌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전제되기 때문에, 모든 '퇴보'는 필연적이겠지만 일시적인 역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한나 아렌트, <폭력의 세기 On violence>(이후, 1999), 53쪽)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가능태이다. 즉 미완성된 씨앗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미래에는 완성된 현실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우리는 완성 가능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아렌트는 인류의 미래가 열려있다는 식으로 저 문장을 해석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편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마르크스는 '완성'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런데 완성이 무엇인지 모르면, 내 현재 상태가 미완성인지 완성인지, 그리고 몇 %나 완성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완성을 모르는데 어떻게 미완성을 안단 말인가.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회를 이야기하든 사회주의 사회를 이야기하든, 그는 그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띠는지 설명한 적이 없으며, 그의 유토피아적 망상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 헤겔로부터 빌려온 마르크스의 역사적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자기 시대의 언어로 바꿔놓은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들은 헛된 꿈을 꾼다. 그들은 민중들에게 완성이 무엇인지 알려주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완성하라고 다그친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폭력 그 자체이며 필연적으로 폭력을 부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진보의 운동은 적대적인 강제력들의 충돌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전제되기 때문이다. 20세기 역사가 이를 증명하기도 한다.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아렌트의 명언 하나~


마오쩌둥 :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

한나 아렌트 :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 권력이다.(<폭력의 세기>,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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