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능동’과 ‘수동’에 대한 개념을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빌려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정신이 자연의 일상적 질서로 사물을 인식할 때,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결정되어 사물과의 우연한 접촉으로 인하여 이것저것을 관찰할 때, 정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도, 외부 물체에 대해서도 타당한 인식이 아니라 단지 혼란한 인식만을 가진다. 그러나 내부로부터 결정되어, 곧 많은 사물을 동시에 관찰함으로써 사물의 일치, 차이와 반대를 인식할 때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정신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내부로부터 결정될 때에는 정신은 내가 다음에서 제시하게 될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을 명석판명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2부 정리 29 주석)
타당한 원인으로 되어 있는 어떤 것이 우리의 내부다 외부에 생길 때, 곧 우리의 본성만에 의하여 명석판명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우리들의 본성에서 우리의 내부나 외부에 생길 때 나는 우리가 작용한다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단지 부분적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우리의 내부에 생기거나 우리의 본성에서 생길 때, 나는 우리들이 작용을 받는다고 말한다. (3부 정의 2)
나는 정서를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러한 변용의 어떤 타당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 경우 나는 정서를 능동으로 이해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는 수동으로 이해한다. (3부 정의 3)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은 스피노자의 난해한 표현들을 익히기 위해 내가 이 구절들을 인용한 것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내 좋아하는 감정에 따라 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을 우리는 ‘능동’ 또는 ‘내부로부터 결정된다’ 또는 ‘작용한다’고 이해한다. 반면에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남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억지로 해야겠다고 결정하는 것을 우리는 ‘수동’ 또는 ‘외부로부터 결정된다’ 또는 ‘작용된다’고 이해한다. 가령 A라는 사람이 음악을 너무나 좋아해서 음대를 가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능동적 사고이다. 반면에 A가 자신은 음악을 너무나 좋아하고 의대에는 관심이 없지만, 부모와 선생님이 의대를 좋아하고 추천하니 할 수 없이 의대를 가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수동적 사고이다. 왜냐하면 그 결정의 원인이 나 자신이 아닌 타인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소비성향과 관련해서, 능동적 사고방식을 지닌 이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소비하는 반면 수동적 사고방식을 지닌 이는 ‘나의 호불호에 관계없이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에 소비한다고 이해한다. 다시 말하면 능동적 사고방식은 합리적 소비(rational consumption)를 추구하는 반면에, 수동적 사고방식은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를 추구한다.
여기서 내가 베블런으로부터 빌려온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에 대해 잠깐 설명하고 내가 그 개념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부가 설명코자 한다. 이를 위해 토드 부크홀츠의 재미있는 해설을 따라가 보자.
베블런에 따르면 개개인은 스스로 판단하기 이전에 우선 다른 사람들부터 살펴본다. 극소수 유행의 주도자나 반사회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울타리 너머 남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그것과 크게 어긋나지 않게 행동한다. 한 상품에 대한 가치판단 역시 남들이 그 상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라던 파인만(R. Feynman, 미국의 노벨 물리학자) 같은 이들은 예외적 소수에 불과하다. 한편 1950년 하베이 라이벤스타인(H. Leibenstein) 교수는 마셜의 수요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특정 재화를 ‘베블런재(財)’라고 불렀는데, 이 베블런재의 경우 수요는 ‘남들이 생각할 만한 그 상품의 가격’ 즉, 과시적 가격(conspicuous price)에 비례한다. 그리고 베블런에 따르면, 과시적 여가와 과시적 소비의 발달과정을 탐색해 보면 명성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두 방편의 유용성이 두 방편의 공통 요소인 낭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시간과 노력의 낭비이고 다른 한편으로 재화의 낭비로 나타난다. 두 가지 낭비는 모두 부를 소유했음을 증명하는 방편이기 때문에 관습적으로 동등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우선 나는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라던 리처드 파인만과 같은 이들이 예외적 소수라고 결코 생각지 않는다. 하물며 사토리 세대 가운데 능동적으로 사고하는 이들은 하버드 대학 교수인 부크홀츠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아마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는 게 당연하지, 뭐 그 따위 사소한 것을 예외적 소수만의 사고방식이라는 거야?’라며 도리어 황당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베블런은 소비의 기준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 두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마치 ‘모든’ 인간들의 본성인 것처럼 주장했으나, 나는 그와 같은 사고방식은 타당하지 못한 수동적 인식일 따름이지 결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베블런재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다만 수동적 사고방식을 지닌 소비자에게는 모든 재화가 베블런재로 인식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능동적 사고방식을 지닌 소비자에게는 모든 재화가 베블런재와는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능동적 사고방식을 지닌 소비자는 다소 높은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오직 자기 자신의 필요에 의해 결정되어 재화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재화도 수동적 사고방식을 지닌 소비자에게는 베블런재인 반면에, 능동적 사고방식을 지닌 소비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똑같은 고가의 옷이라도 진정 자기 자신의 필요에 의해 구입하는 이에게는 그것이 베블런재일 이유가 없지만, 남들이 좋다고 말하니 자기가 좋아하지 않아도 눈치 보며 구입하는 수동적 소비자에게는 베블런재이다. 여기까지가 베블런 경제학에 대한 나의 반론이다.
하지만 베블런은 인간의 착각으로 인한 소비성향 및 그에 따른 결과를 그 어떤 경제학자보다도 정확히 지적했다. 아인슈타인이나 파인만 같은 이들은 오직 자신의 욕구를 기준으로 해서 능동적으로 소비를 결정한다. 하지만 베블런이 비판한 수동적 소비자들의 ‘한 상품에 대한 가치판단은 남들이 그 상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가 곧 명성을 획득키 위한 낭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정확히 지적했다. 다시 말해서 과시적 소비는 곧 과소비 또는 낭비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게 베블런의 주장이며, 나 또한 이에 동의한다.
나아가서 나는 향후 논의의 편의를 위해,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을 베블런이 그랬던 것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코자 한다. 베블런은 유한계급이 여타 계급들과 자신을 차별하기 위한 ‘허영심’에서 과시적 소비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유한계급뿐만 아니라 모든 계급들이 결국 그와 같은 과시적 소비를 모방하지만, 본질적으로 과시적 소비는 유한계급에서 시작되고 그들에 속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남들에게 뻐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남들 속에서 튀지 않으려고 남들을 따라 소비하는 소비심리 또한 과시적 소비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서 베블런은 남들과 자신을 차별 키 위해 과시적 소비를 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많은 경우 사람들이 남들과 자신 사이의 차별을 지우기 위해 남들에게 보이는 과시적 소비를 하는 경우 또한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몇 년간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동일한 브랜드의 아웃도어 제품을 마치 교복인 양 똑같이 사서 입고 다닌 것이 그 구체적 실례이다. 그들은 말한다.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그들과 내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고. 그들이 사서 입는 옷이 너무 비싸서 심지어 ‘부모님 등골 브레이커’로 불리기도 하지만, 그들은 결코 허영심 때문에 그 옷을 구매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 옷을 구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소비라면 그것이 터무니없는 과소비이든 아니든 내게는 모두 ‘과시적 소비’이다. 반면에, 남들의 선호 대신 오직 자신의 선호를 기준으로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하는 소비는 모두 ‘합리적 소비’에 해당한다. 그리고 ‘합리적 소비’는 능동적 사고방식과 연관되고 ‘과시적 소비’는 수동적 사고방식과 연관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