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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주, 거꾸로 교실을 시작하다!

▶ 대망의 첫째 주 수업이 시작되었다. 내가 맡은 <고전명저 북클럽>은 1학년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필수 교양과목이다. 아직 고등학생 티를 채 벗지 못한 학생들이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강의실로 쏟아져 들어온다. 나에게 “안녕하세요, 교수님.”하고 인사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어색하게 구석 자리를 찾아가는 과거의 나와 같은 학생의 모습도 보인다. 나는 5분 전에 강의실에 입장한 뒤, 기자재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체크하며 심호흡을 한다. 강의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어서 빨리 학생들과 마주하고 싶다는 기대감에 숨이 지나치게 가빠졌기 때문이다. 



▶ 나는 수업 시간에 반드시 출석을 체크한다. 성적에 반영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는 것은 면대면 수업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 가운데 하나이다. 이 때문에, 나는 전자출결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는다. 본래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시스템이지만, 그것을 악용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안면인식이 가능한 수준의 시스템이 아니라면, 친구에게 두세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빌려주기만 해도, 결석으로 체크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스마트폰으로 자기 인증을 하는 것이 바로 전자출결 시스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나는 비인간적이고 비효율적이기도 한 전자출결 시스템을 앞으로도 자의로는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 수업 시작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한 뒤, 나는 미리 출력해 둔 출석부를 보며 한 명씩 호명하기 시작한다. 출석부는 가급적 컬러로 프린트를 하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학생들의 얼굴을 분명히 파악해서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고학년일수록 출석부의 사진과 실제 모습이 다른 경우가 많으므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생들의 이름은 가급적 외우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강사가 자신의 이름을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학생들은 훨씬 수업에 호의적인 태도로 변하기 때문이다. 가령 수업시간에 누군가가 떠든다고 할 때, “거기 뒤에 있는 애, 좀 조용히 해 줘!”와 “철수야, 지난주에 회사 면접 보러 간다더니, 성과가 좋았나 보지? 그래도 쉬는 시간에 이야기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는 전혀 다른 반응을 이끌어낸다. 자신이 지난주에 이야기했던 사적 스케줄을 기억하는 강사에게 퉁명스레 대하는 학생은 없다. 대부분 배시시 웃으며 다시 수업에 집중한다. 


▶ 출석체크가 끝나면, 나는 곧장 자기소개로 들어간다. 물론 스타트는 내가 끊어야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나를 ‘이주강 교수’가 아닌 ‘사이타마 센세’로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10년이 넘도록 빡빡머리 헤어스타일을 고수해왔다. 그 과정에서 <드래곤볼>의 무천도사나 크리링 등의 별명을 얻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율 브리너라는 과찬을 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외모적으로나 시기적으로나 내게 가장 어울리는 인물은 넷플릭스 인기 애니메이션 <완판맨>의 주인공인 사이타마였다. 물론 사이타마와 나는 급이 다르다. 그는 너무 강력한 나머지 적수가 없어서 지루함에 빠진 인물이다. 나는 그와는 반대로, 몇 년째 하는 수업조차도 힘이 들어 허덕댄다. 하지만 내게는 그와 마찬가지로 가공할 만한 ‘원 펀치’가 있다. 나는 한 학기 동안, 성선설이라는 펀치로 각종 사회 문제들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여줄 심산이다. 물론 나는 방구석 여포다. 강의실을 나서는 순간, 성선설은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말장난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적어도 교실 내에서 나와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성선설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유용한 지 끊임없이 테스트해 볼 예정이다. 거꾸로 교실이라는 수업 방식 자체는 낯설지만, 성선설에 대한 강의는 몇 년째 해오던 것이라 그다지 두렵지 않다. 나와 사이타마의 사진을 양옆에 놓고 비교하는 슬라이드가 뜨자마자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드는 학생들을 보며, 이번 학기도 한 번 해 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 또한 학생들은 교수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어떤 철학을 학생들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소개할 때는, 그 철학이 교사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었음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나 자신의 몸과 감정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성선설이 어떻게 내 삶을 좀 더 풍요롭고 안정적으로 바꾸었는가를 조곤조곤 히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물론 성선설의 핵심 내용을 위와 같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학생들은 성선설과 성악설, 유학(儒學) 등에 대한 크고 작은 사전 지식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학생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향후 수업시간에는 이와 같은 사전 지식들을 남김없이 끌어내어 한꺼번에 검토하는 토론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 대학 교수들은 하나라도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 학부 때를 돌이켜 보자. 기억에 남는 수업은 몇 개이며, 그나마 기억할 만한 수업들 가운데 기억이 나는 내용은 몇 개이던가? 학생들이 한 학기 수업에 서너 개의 혜안만 챙겨갈 수 있어도, 그 수업은 성공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기 계발 서적들을 살펴보라. 모두 한 줌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수많은 예시를 들어놓았다. 그리고 독자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대학의 수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1주에 하나의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만으로도 수강자는 자기 삶의 지평이 확대됨을 느낀다. 

사실 대학 교수들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가르치려 든다. 어째서인가? 상대평가를 통해 성적을 매겨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학생들이 수업 내용을 완벽하게 소화할 경우, 상대평가를 통한 등급 구분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감당해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가르쳐야만, B나 C를 줄 여지가 확대된다. 암기 위주의 과목일 경우, ‘시험의 객관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 얼마나 참담한 현실인가. 다행스럽게도, 내가 이번에 맡은 <고전명저 북클럽>은 수강 인원의 90%까지는 A나 B를 줄 수 있다. 거의 절대평가에 가까운 수준이다. 보통 주어진 조건이 이와 같을 경우, 갑작스레 질풍노도의 시기를 만나 수업에 흥미를 잃은 학생들이 대부분 하위 10%에 속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불편한 감정을 추스르고, 소중한 학생들에게 상대적으로 마음 편히 학점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 하지만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나는 모든 학생들이 뛰어나고 A를 받을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교수인 내가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성적 평가 방식은 수강생의 강의 이해를 완벽하게 반영할 수 없다. 나는 수년째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시험 잘 보는 요령에 통달한 학생이 묵묵하게 수업에 열심인 학생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을 때때로 막을 수 없었다. 나의 불찰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육 시스템이 바뀌지 않고서는 이와 같은 불합리가 개선될 수 없다. 나는 이렇듯 학생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수업에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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