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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철학의 한국 수용사


이번 주 토요일에 한중 인문학 포럼에서 "한국과 중국 지식인들의 사회진화론 수용"에 관해서 발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국제 세미나임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중국 학자들이 한국에 올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다행히 시차가 크기 않아서 실시간 세미나를 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11월에는 무려 세계 인문학 포럼이 경주에서 열리는데요. 아프리카나 유럽, 미국 등의 학자들이 한국 학자들과 실시간으로 토론하기 위해서는 잠을 아예 자지 말아야 하겠지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서, 국제 포럼도 살아남기 위해서 참으로 다양한 방법을을 구상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승자독식과 우승열패를 정당화하는 사회진화론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중국의 지식인인 량치차오(양계초)와 조선의 신채호는 저와 입장이 달랐지요. 두 분 모두 존경받는 지성인입니다만, 그들은 모두 인간의 본성은 전투적이라고 주장했지요. 물론 그들은 순화된 표현을 썼습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영혼은 본디 "병사의 영혼"이라고 말입니다. 다만 평화를 주장하는 유학 덕분에 그 영혼이 문약해져서 서구 제국(일본 포함)들로부터 침탈을 당했으니, 내 안의 "파괴적 본성"을 다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중국 학자는 당시 시대 상황으로 보아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부국강병을 반드시 사회진화론으로 이룰 필요는 없다고 답할 예정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진화론은 자기 방어가 아닌, 약자 침탈을 위해서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든요.


그런데 이와는 별도로, 중국 학자는 "중국에는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개념과 사회진화론을 함께 다룬 연구가 있다. 20세기 초반 한국은 어떠했는가?"라는 질문을 보내오셨습니다. 니체 전공자가 아닌 저로서는 굉장히 난감했습니다. 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새로이 연구하기에는 시간과 역량이 모두 부족했거든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니체 전문가께서 이미 연구를 마쳐놓으셨습니다.

http://www.jeolla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97060

김정현 선생님의 연구는 <니체 사상의 한국적 수용-1920년대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정리되어 2017년에 한국에 나왔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연구물이라서, 여기 간략하게 정리해놓을까 합니다.


1919년 3.1 운동으로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이후, 조선에서는 서양의 다양한 사상들 속에서 대안을 찾고자 하는 지적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특히 1919년에서 20년 사이에 버트런드 러셀과 존 듀이가 베이징과 도쿄에서 강연했는데, 이 두 학자가 한중일 3국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 서양철학 신드롬이 일어났고, 그 분위기는 한국으로 이어졌습니다. 1920년 6월 25일 창간된 천도교 계열 잡지 <개벽>은 니체와 더불어 여러 서양사상들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니체에 관한 첫 번째 소개는 <개벽> 창간호에 "소춘"이라는 필명의 작가가 기고한 "역만능주의力萬能主義의 급선봉"이라는 글입니다. 여기서 소춘은 니체의 사상을 "힘 만능주의"로 정리했습니다. "권력에의 의지"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한 것이지요. 소춘은 개인적으로 고난을 많이 겪었던 니체의 철학을 통해, 식민지의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내적 희망을 비추었습니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심도 있는 논의가 전개되지는 않았습니다.

<개벽>의 다음호에는 묘향산인이라는 필명을 지닌 작가가 '역만능주의'에 대해 좀 더 자세한 논의를 펼칩니다. 그리고 그는 사회진화론과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다음과 같이 연결합니다. "니체는 생물의 본능은 자기 보존이 아니라 권력의지의 발휘라고 보았다. 이러한 묘향산인의 해석은 니체 사상을 단순히 소개하는 원론적 수준을 넘어 니체 사상의 핵심 쟁점을 정확히 읽고 있으며, 또한 니체의 권력의지가 인간이 처한 각자의 환경을 제단 하려는 힘을 제공한다고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시대상을 넘어서려는 확실한 의도를 담고 있다."(김정현 논문, 48쪽)

묘향산인은 아울러, 니체에게 있어 선악의 문제는 곧 강약의 문제라는 점 또한 지적해내었습니다. 니체에게 있어 선이란 힘의 느낌이며, 악이란 약함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선악의 피안)"가 묘향산인에게는 앞선 바와 같이 정리되었습니다. 결국 묘향산인에게 니체의 철학은 시대적 고통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대안이라는 점에서 무척이나 매력 있었습니다.


한편 <개벽> 9호(1921)에는 박달성이라는 인물이 조선에서 '톨스토이주의와 니체주의가 대립 중이다'라는 흥미로운 기고를 제출했습니다. 그는 니체의 초인 사상과 톨스토이의 동포주의적 박애주의를 비교했는데요. "니체의 초월관에 따르면 진화 및 향상이 가능하나, 톨스토이에 따르면 상하귀천은 없지만 약자빈자를 위해 눈물만 흘리게 되며, 그의 인도주의는 그 이념은 좋으나 생존 경쟁하는 인류사회의 흐름에서 자기 보존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그 주장의 요체입니다.(김정현, 53쪽) 약육강식과 우승열패는 자연의 법칙이기에, 니체의 역만능주의가 결국에는 승리할 것 같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결국 "그의 입장 역시 그 당시 지성계를 풍미하던 사회진화론의 입장에서 니체주의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생존에서 분투하고 승리한다는 것, 곧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일제 식민지 시대에 니체는 박달성에게 강함과 힘, 생존의 이념을 제공하는 철학으로 읽힌 것이었습니다."(김정현, 54쪽)

결국 김정현이 잘 정리한 대로, "초기 조선 지식인들이 받아들인 니체는 식민지 시대의 시대적 고민을 넘어서려는 강력한 힘의 철학, 의지의 철학을 표명하는 사회철학자로의 니체였습니다. 즉 초기 수용된 한국적 니체는 사회진화론적인 입장에서 자신과 시대를 극복하는 강력한 힘의 주창자이자 사회철학자였던 것입니다."(김정현, 61쪽)


결국 "권력에의 의지"를 주장한 니체의 "역만능주의"는 사회진화론과 맞물려서 당대의 조선 지식인들에게 매우 강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실 "역만능주의"와 "권력에의 의지"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매혹적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분명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우승열패와 승자독식을 "어쩔 수 없는 사태"라고 체념할수록, 그 사태는 더욱더 현실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힘을 사회진화론적 방식으로 기르면, 결국 그 힘을 잘못 사용하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습니다. 소통과 연대로도 우리는 강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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