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던 월린, <정치와 비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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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1984>에서, 그리고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전체주의를 그려내 보였다. 닐 포스트먼의 <죽도록 즐기기>에 따르면, <1984>의 전체주의는 폭력과 직접적 통제를 특징으로 한다. 반면에 <멋진 신세계>의 전체주의는 인민에게 어린 시절부터 마약과 섹스라는 쾌락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통제에 성공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도덕적 불감증>에서,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두 고전을 비교해서 다루었는데,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노자의 전체주의는 그러나 <1984>도 <멋진 신세계>도 아니다. 노자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노자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위해 우민 정치를 펼친다. 루소의 고귀한 야만인 이론과 노자의 우민 정치는 동일한 의도와 목표를 지닌다. 노자는 전쟁을 싫어하는 빅 브라더이다. 그는 마약과 섹스를 경멸하는 헨리 포드이다. 그는 직접적인 억압도, 간접적인 쾌락도 제공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루소와 기본적인 입장이 같다. 갓 태어난 인간의 본연은 순박하다. 이 때문에 제왕이 해야 할 일은 우민정책을 통해 인민의 순박함을 보전해주며, 그 순박함을 해치는 문명의 손길을 항상 차단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민은 소와 닭을 치고 문자 대신 노끈으로 의사를 전달하며, 동물처럼 우매하고 평안하게 살아갈 것이다. 소국과민의 이상향(도덕경 80장)에는 <1984>의 전쟁도 <멋진 신세계>의 쾌락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통제되며, 무지와 무욕만 남은 인민들의 삶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적인 면이 제거된 인민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치는 소나 닭과 같다. 문명을 발달시키지 못한 그들은 병충해에 취약하고,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단번에 휩쓸려 멸망할 것이다. 그들의 영양 상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부실할 것이며,여성이나 어린이 등 약자의 인권 또한 보장받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 노자 연구가들은 <도덕경>이 우민정책을 선호한다는 점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고자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으로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단 한 점의 사심 없이" 우민정책을 펼친다는 것을 상상하기를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우민정책은 모두 <1984>나 <멋진 신세계> 속의 비판적 지식인 탄압, 일제가 조선 식민지에 가했던 우민 교육정책과 관련된다. 이 때문에 선행연구에 의존하는 학자들은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기를 꺼려한다. <도덕경> 속의 노자는 늙은 혁명가이다. 그는 결벽주의에 가까운 이상주의자이며, 80년대 운동권 학생과도 같은 순수함을 지녔다. 노자는 사적인 권력욕이 전혀 없으며,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투신한다. 그는 "마침내 올 해방 세상 주춧돌이 될" 각오로 투쟁한다.
그러나 노자가 꿈꾸는 해방 세상은 마르크스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노자는 진보를 믿지 않았다. 그는 물질적인 진보가 오히려 인민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전쟁과 탐욕을 부른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는 우민정책을 통해 인민들의 지적 능력을 개나 돼지의 수준으로 유지함으로써, 물질적인 진보를 막고 원시공동체 사회를 유지해나가고자 힘썼다. 그는 <도덕경> 80장에서 결승문자를 사용하는 인민을 그리는데, 중국 역사에서 결승문자의 사용은 요순시대보다 앞선 삼황오제의 시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인 헌원 황제의 신하가 창힐인데, 창힐이 결승을 문자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결승문자의 사용 시기는 적어도 신석기 초기 혹은 그 이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아마 마르크스라면 노자를 '유토피안 사회주의자' 또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비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냉소는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