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너무 늦게 깨닫지 않기를>
캥거루는 말티즈를 사랑한다. 그는 항상 말한다. "말티즈, 네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 너를 향한 내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
그런데 캥거루는 말티즈를 사랑했을까, 아니면 말티즈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을까? 캥거루는 말티즈를 사랑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나르시시즘에 빠져 버린 것일까? 캥거루의 자존감은 바닥을 친다. 사실 그 때문에 캥거루는 더욱 남 앞에서 강하게 보이려 한다. 하지만 본디 강하지도 못한 그가 모든 사람 앞에서 24시간 강한 척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가장 편안히 여기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나약해지고, 그들에게 의존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착하디 착한 말티즈는 캥거루가 가장 의지하는 대상이다. 그런데 캥거루는 사랑에 있어서도 결국 정직하지 못하다. 그는 자신의 자존감을 높여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바로 "한 여자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순수한 남성상"이다. 캥거루는 말티즈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아 바로 그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캥거루는 다른 여자에게 한 눈 팔지 않는다. 그는 말티즈와 사귄 뒤로, 그녀 외의 다른 여자는 생각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캥거루는 쓰라린 진실을, 또 다른 그의 거짓된 자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티즈를 그의 혓바닥이 놀리는 것만큼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말티즈에게도 거짓말쟁이였다. 자기를 믿고 기다려주는 말티즈에게 수년 동안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그는 오늘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하기는, 2020년 한 해 동안 뭔가가 진실로 하고 싶었던 때는 드물었지만 말이다.
그는 말티즈를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말티즈가 있어야만, 말티즈를 영원히 사랑하는 남자라는 페르소나를 지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그는 그동안 얼마나 거짓된 삶을 살아왔던가.
아서 시아라미콜리는 <당신은 너무 늦게 깨닫지 않기를>(2020)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사소프의 랍비 모세 레이브는 한 여관에서 술 취한 농부가 친구에게 묻는 말을 듣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날 사랑하는가?' 두 번째 농부가 말했다. '물론이지. 자네를 형제처럼 사랑하네.' 하지만 첫 번째 농부는 고개를 흔들며 고집했다. '자네는 날 사랑하지 않아.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 또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지 않나.' 두 번째 농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캥거루는 말티즈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말티즈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또 무엇이 진정으로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 그는 너무도 자기 세계 안에 갇혀 있어서, 타인에 대한 관심 따위는 접어둔 지 오래이다. "아아,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던가." 캥거루는 오늘도 반성한다. 그러나 나아지는 바가 없다. 자포자기한 그는 오직 자신의 파국을 기다리는 재미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