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210810 홍콩 자가격리 3일 차

슬로 앤 미니멀 라이프스타일 제안

자가격리 2일 차 같은 3일 차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벽에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서 제법 볼 만했는데, 점심 무렵이 되자 거짓말처럼 해가 쨍쨍합니다. 

하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시커먼 구름이 끼어 있습니다. 충분히 수면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하품이 계속 나오는 것이, 아무래도 신선한 공기 부족 때문인 듯합니다. 환기 문제가 이렇게 다가오네요. 환기의 경우, 제가 방을 나서지만 않으면 되므로, 현관문을 힘차게 여닫으며 바깥공기(그래 보았자 복도 공기이지만)를 들여오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스무 번쯤 헉헉대면서 문을 여닫고 나면 공기가 훨씬 낫습니다. 이때에도 반드시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만 합니다. 참고로 제 방은 복도 끝에 위치하고 있는데, 맞은편 방에는 프랑스어를 쓰는 가족이 묵고 있습니다. 꼬마 남자아이와 엄마의 목소리까지는 들었습니다. 성인 남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치 그들이 복도를 걸어 다니면서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요. 자가 격리 기간에 방을 나서게 되면 25,000 홍콩 달러의 벌금과 6개월 동안의 감옥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홍콩) 공안은 이런 점에 있어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철저하지요. 사내아이가 마구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마 자기 방에서 그러는 것이겠지요. 설마 복도를 뛰어다닐라고요. 아마 환기 차원에서 문을 좀 오래 열어놓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쪽 방의 목소리가 들릴 때면 문을 열어서 확인해보고 싶다가도 고개를 저으며 그만둡니다. 만약에 양쪽 방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그 장면이 호텔 CCTV에 찍히기라도 한다면(반드시 촬영되지요), 저는 황당한 상황을 접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이왕 거기에 발이 묶였으니, 영화 <올드 보이>에서처럼 복싱도 연습하고 해서 몸짱이 되어서 나오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객실 바닥 카펫의 형상이 얼핏 <올드 보이>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방은 우중충하거나 갑갑하지 않으며, 폭력의 충동을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올드 보이> 오대수가 만두를 먹는 장면입니다. 저는 책상에 앉아 먹습니다.  
바닥 카펫은 <올드 보이> 오대수 방과 잘 어울리지만 분위기는 밝습니다
<올드 보이>의 복도 장면입니다.
제가 자가격리 직전에 찍은 제 방 복도 사진입니다. <올드보이>스럽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먹지는 않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넷플릭스를 보며 식사합니다. 

다만 친구들이 계속 <올드 보이> 이야기를 하니, 갑자기 만두가 먹고 싶어지기는 했습니다. 홍콩은 딤썸의 도시이니, 자가격리가 해제되고 나면 딤썸 맛집들을 찾아다니면서 포스팅할까 합니다. 참고로 홍콩 자가격리 시 호텔을 고를 때, 책상이 있는 객실을 고를 것을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저는 자가격리 중에 일을 해야 해서 이 점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홍콩 라마다 그랜드뷰 호텔보다 가격이 높은 호텔 가운데에서도 책상과 의자가 제공되지 않는 곳이 꽤 있습니다. 3주 자가격리 동안 딱히 할 일이 없다고 하시더라도, 책상 유무는 큰 차이를 냅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상은 동그란 티 테이블이 아닌, 공부나 작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구조의 책상을 말합니다. 

또한 혼자서 지내시더라도 퀸 사이즈 원 베드가 아닌 트윈 베드룸을 구하실 수 있으면 좋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하나의 침대 위에 짐을 쌓아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침대가 하나 더 있으면 공간 활용 면에서 매우 효율적입니다.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부끄럽습니다만, 저는 취침용으로 하나의 침대만을 쓰고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 중입니다. 그 외 수납용 서랍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속옷이나 양말 등을 얹어서 널어놓기에 적당합니다. 물론 수납공간이 많아서 나쁠 이유가 전혀 없지요. 


오늘은 홍콩 위생처(The Department of Health) 위임 기관에게 제 타액 샘플을 제출하는 날입니다. 홍콩 자가격리 3일 차에 여행객들은 사전에 받은 샘플 용기에 타액을 담아서 동의서와 함께 제출해야 합니다. 

타액이라고는 하지만, 침을 탁 뱉어서는 안 되며, 영혼까지 가래를 끌어모아서 여러 번 뱉어내서 당국이 요구하는 용량에 맞추어야만 합니다. 저로서는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타액 채취가 끝나면 저 깔때기를 뺀 뒤 용기 주변을 알코올 솜으로 잘 닦고 나서 뚜껑을 닫아줍니다. 닫은 뒤에도 주변을 알코올 솜으로 충분히 소독합니다. 이제 샘플 백에 샘플을 넣으면 되겠습니다. 

사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저 샘플 백을 담을 더 커다란 샘플 백이 있는데 앞면과 뒷면에 각각 수납공간이 있습니다. 대용량 샘플 백 앞쪽에는 방금 채취한 타액을 담은 샘플 백을 넣고, 뒤쪽에는 기작성 된 동의서를 넣습니다. 제 여권번호가 나와 있는 동의서 앞면이 바깥쪽을 향하게 넣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제출 준비가 끝납니다! 

그러면 제 타액을 찾으러 언제쯤 방문할까요? 미리 제게 방문시간을 알려줄까요? 적어도 저와 제 후배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혀 예고 없이 갑자기 벨을 눌러서 샘플 받으러 왔다고 통보합니다. 이 때문에 아침에 샘플을 채취한 뒤에 온종일 각을 잡고 기다려야만 합니다. 제가 지난 글에 적었지만, 저는 여기서 "나는 자연인이다" 복장으로 살고 있습니다.(절대로 벌거벗지 않습니다. 호텔의 시트와 카펫 상태를 볼 때, 벌거벗는 것은 오히려 피부 건강에 해롭습니다. 하의든 상의든 그러합니다. 고급 호텔의 경우도 신용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저보다 자가격리를 일찍 시작한 후배가 상세히 알려준 덕분에, 저는 오늘만큼은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방문객을 기다렸습니다. 1시가 조금 넘어서 느닷없이 벨이 울렸고, 저는 마스크를 쓰고 침착하게 옷을 갖춰 입은 채로 문을 열었습니다. 젊은 여성분이었습니다. 대충 입고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제가 샘플 백을 건네주자 우선 제게 그것을 들고 있으라고 한 뒤에 앞면과 뒷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샘플 백을 받아 든 뒤에 제게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이 또한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여권 번호를 확인한 뒤, 그녀는 마스크 뒤로 빙긋 웃으며 "Thank you!"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네이티브 잉글리시 스피커가 아니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홍콩 분들은 대체로 굉장히 빠르게 말씀하십니다. 홍콩 특유의 억양도 있고 해서, 알아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동안 적응 기간을 가져야 할 듯합니다. 그래도 격리 3일차(8/8 23:00에 홍콩에 도착했고 지금은 8/10 오후이니, 아직 48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만에 사람 구경을 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타액 채취와 관련된 소개 내용이 생각보다 드문 것 같아서 조금 자세히 적어보았습니다. 앞으로 홍콩을 방문하시려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오늘 아침에는 꽃빵과 면요리가 나왔고, 점심에는 양배추+당근+흰밥에 생선 요리가 나왔습니다. 베이스 양념이 똑같으니까 닭이나 돼지나 생선이나 뭐 맛이 똑같습니다. 사는 게 다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자가격리 3일 차 아침
자가격리 3일 차 점심 

이제 <우버 이츠>의 유혹에 슬슬 넘어갈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저도 참을성이 무척이나 부족한 모양입니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어도 우버 이츠는 호텔 주변에 저렴하게 맥주를 배달해주는 곳을 제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제 검색 실력이 시원찮을 수도 있고 간절함이 부족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난데없이 KFC에서 페일 에일(pale ale)을 파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엄청난 유혹이 밀려와서 제 대뇌를 꽉 움켜쥐고 이리저리 흔들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홍콩 빅맥 세트가 60홍달(홍콩달러)인데, 71홍달(만 원이 넘습니다)이 넘는 돈을 주고 사 마시기는 좀 그랬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배달료가 추가될 수도 있고요. 게다가 18세 성인인증이 저를 귀찮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너무도 간절히 마시고 싶다면 그때 또 도전해보지요, 뭐. 여하튼 맥주병에 찍힌 KFC 마크와 할아버지 얼굴이 몹시도 매력적입니다. 몇 년 전 홍콩 핼로윈 축제 때 "잭 다니엘 콜라"를 엄청 마셨는데, 앞으로도 홍콩에서 접할 수 있는 독특한 식문화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라고 말하며 오늘도 자가격리 죄수는 한숨을 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210809 홍콩 자가격리2일 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