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210814 홍콩 자가격리 7일 차

슬로 앤 미니멀 라이프스타일 제안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어저께는 불금이었구요. 하지만 호텔 내에서 자가격리 상태인 제게는 주말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루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즐거움이야 제가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니까요. 아침 식사로는 꽃빵과 면이 나왔네요. 상추와 함께 먹은 뒤, 플라스틱 용기를 깨끗이 세척해서 말렸습니다. 이로써 반찬이나 채소를 담을 용기를 2개 확보했습니다. 자가격리 초기에는 감잎차를 마셨지만, 이제 뜨거운 차를 마시기가 버거워졌습니다. 밀크 티를 넉넉히 준비해놓고 끊임없이 마시고 있습니다. 여동생은 당뇨를 조심하라고 걱정스럽게 충고해 주었습니다. 자가격리가 끝나면 이렇게까지 마실 일은 없을 듯하지만, 그래도 동생의 조언에 따라 하루 섭취량은 조절에 들어가야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아침부터 마시고 있네요. 토요일 아침에는 침대에 드러누워 미디어패드로 유튜브 보면서 밀크 티 마시는 재미라도 있어야지요. 자가 격리 기간 동안 논문을 좀 써야겠다는 제 허황된 생각은 어느 사이 안드로메다로 가고 말았습니다. 저는 역시 철학을 문자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내는데 더 관심이 있는 타입 같습니다. 수천 년 동안 동서양의 뛰어난 현인들이 축적해 놓은 유교와 불교, 도교의 가르침은 다채롭고 풍부하며, 오늘날에도 매우 유용합니다. 실제로 울트라 마라톤 러너나 철인 3종 경기 출전자, 그 외에 가장 격렬한 액티비티를 즐기는 외향적 사람들이 동양철학에 심취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21세기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학계에 몸을 담고 있는 제가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을 쓰는데 흥미를 잃어간다는 것은 분명히 학자 커리어로서는 좋은 조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을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저와 세상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가치와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동양철학에는 아주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소중한 보석들을 캐기 위한 시행착오의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침 식사 및 개인 정비를 마치고 나서 <정원의 세계여행>을 몇 편 시청합니다. 1주일 전에 올라온 가장 최근 영상에는 태국 1일 코로나 확진자 수가 2만 명을 넘었고, 조만간 태국을 떠날 예정이라는 공지가 있었습니다. 아울러 11만 구독자 유튜버로서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고민이 깊이 담겨 있었습니다. 치앙마이에 몇 달 동안 살면서 코로나 사태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가게나 명소들이 문을 닫은 상황이라, 딱히 새롭고 신선한 상황을 발굴하거나 만들어내기가 힘든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동영상에 달려 있는 댓글들이 바로 <정원의 세계여행>이 단기간에 급성장한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그 채널의 구독자들은 "착한 심성의 주인장이 매일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하루를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된다"며, 새로운 콘텐츠 개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제 생각도 동일합니다. <정원의 세계여행> 주인장은 정말로 축복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태국 여행 초반에 그는 너무도 돈이 없어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해 피부병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잃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신의 심정을 읊었습니다. 그의 동영상에서는 오디오가 끊기지를 않습니다. 혼자서 중얼중얼 하면서 식사하고 카페 모카를 마시는데, 시청자 입장에서는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사실 태국을 사랑하는 여행자들은 매일매일이 새로운 다채로운 삶보다는, 평온하고 느릿느릿한 슬로 라이프를 꿈꾸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정원의 세계여행>은 그야말로 취향 저격입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해외 여행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는 더욱 주목받고 있습니다. 마음씨 착한 그가 세계 어디에 있든 콘텐츠 개발 때문에 괴로움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11시가 되니 갑자기 복도가 시끌시끌해졌습니다. 벨소리가 들립니다. 제가 온라인으로 주문한 것이 없어서 제객실의 초인종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맞은편 방 손님은 거의 매일 배달을 시켜서 벨이 자주 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저를 대상으로 코로나 검사를 하러 온 분들께서 벨을 울리셨던 것입니다. 저는 다음 주에나 검사를 하게 될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당황했습니다. 덜렁거리는 제가 또 날짜를 착각한 모양이지요. 현관 문을 열고 보니 철저하게 방역복을 갖춰 입은 두 명의 직원이 제게 여권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여권을 준비하기도 전에 엄청나게 길게 뭔가를 설명해주었는데, 말이 너무 빨라서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적지 않게 당황스럽습니다. 아마 다음달 출근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홍콩 스타일 영어에 익숙해질 때까지 꽤나 고생 좀 할 듯합니다. 그 분들은 제 방에 들어오지 않으셨고, 저는 제 방에서 여권 번호를 보여드렸습니다. 제게 비닐백을 하나 주더니, 열어 놓은 상태로 대기하라고 합니다. 이윽고 면봉을 꺼내어 제 입과 양 콧구멍을 부지런히 쑤십니다. 샘플을 확보한 뒤 본인의 수술용 장갑을 벗어서 제 비닐백에 넣은 뒤 인사하고 바쁘게 사라집니다. 저는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분들이 가고 나서도 비닐백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유튜브에는 코로나 검사를 하러 오신 분들을 하나하나 촬영하는 센스 있는 분들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대단한 침착성으로 그 일을 해내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허둥지둥하다가 사진 하나 남기지도 못하고 비닐백만 들고 서 있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검색을 해 보니, 21일의 자가격리 기간 동안 자가격리 7일 차, 12일 차, 19일 차 등 총 3일에 걸쳐 목과 코 검사를 한다고 하네요. 저는 12일 차와 19일 차에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나머지 양일에는 저도 여유롭게 사진도 좀 촬영하고 그래봐야겠습니다. 


자가격리 일주일 째에 접어들다 보니, 한국에서 꼭 가지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이템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홍콩 자가격리를 앞두고 계신 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1) 어댑터: 홍콩을 여행하면서 어댑터를 준비하지 않는 분들은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댑터를 여러 개 준비하시는 편이 좋다고 말씀드립니다. 아울러 멀티탭도 가급적 가져오시기를 권합니다. 2) 고추장: 저는 한국에서 고추장을 그리 즐겨 먹지 않습니다. 비빔밥을 먹을 때 고추장으로 비비지 않으며, 복어국을 먹을 때에도 "지리"로 주문합니다. 하지만 홍콩의 달착지근한 음식은 금세 물립니다. 고추장 또는 본인이 선호하는 양념장을 들고 오시면 21일 자가격리가 훨씬 수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3) 물티슈: 아무래도 21일 동안 식사를 방 안에서만 하다 보니 물티슈가 필요한 상황이 여럿 발생합니다. 홍콩 마트에서 주문해도 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대용량 저렴이 물티슈를 챙겨 오시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4) 쿨메쉬 소재 의류: 여기서 메쉬 소재를 추천드리는 까닭은 빨리 마르기 때문입니다. 자가 격리 기간 동안 호텔 객실에서 빨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빨리 마르는 소재의 옷을 챙겨가는 편이 좋습니다. 저는 달리기를 좋아하다 보니, 거의 모든 여름 옷이 빨리 마르는 소재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옷들을 챙겨왔는데, 아주 도움이 되었습니다. 5) 지퍼백: 다양한 크기(사실 크면 클수록 좋습니다)의 지퍼백은 자가격리를 포함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도움이 됩니다. 6) 과도: 채소와 과일을 다듬는 과정에서 과도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칼의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지요. 그 외 빨래거리가 많은 분들은 다이소 빨랫줄이나 집게가 달린 행거 등도 필수 아이템입니다. 많은 아이디어들이 있었는데, 적으려고 책상 앞에 앉으니 생각이 나질 않네요.


점심 때는 라자냐가 나왔는데, 상추에 토마토를 곁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맛은 있었는데 과식하게 되었습니다. 토마토나 사과는 오후에 간식용으로 먹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이와는 별도로 이제 밀크 티는 제 자가격리 기간 동안에 뗄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자가격리 7일 차가 되니까, <베어 그릴스>를 보면서 식사하게 되었네요. 널리 알려졌지만, 베어 그릴스는 날것의 연어나 구더기 등을 그대로 뜯어 먹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위가 약한 분들이 식사 중에 보시라고 권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먹는 음식이 "진수성찬"이라고 느끼기 위해서 오히려 <베어 그릴스>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IT가 온 세상을 지배하는 듯하지만, 사람들은 기계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오히려 날것의 삶을 동경하고 찾아나섭니다. 기질이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라면 더 할 나위 없겠지요. 


크로스 하버 터널(Cross Harbour Tunnel)은 구룡반도와 홍콩섬을 잇는 해저터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구룡반도와 홍콩섬을 걸어서 건너는 방법은 없습니다. 도보 다리를 놓아달라는 청원이 적지 않았지만, 홍콩 정부는 수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평소에는 버스와 승용차만 다니는 크로스 하버 터널을 두 다리로 건널 기회가 없지는 않더군요. 바로 매년 열리는 "스탠다드 차터드 홍콩 마라톤"입니다. 그 날은 터널이 마라톤 행사로 인해 통제되고, 러너들은 터널을 통과하여 구룡 반도에서 홍콩섬으로 넘어가지요. 걷든 뛰든 해저터널을 건너볼 수 있는 멋진 기회이지요. 그러나 불행히도 코로나 사태로 인해, 2020년과 21년에는 이 대회가 개최되지 못하였습니다. 2022년에는 가능할까요? 손 꼽아 기다려봅니다. 


신기하게도 4시 반이 되면 어김없이 배가 고파옵니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그 때마다 당장 뭔가를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니 냉장고 안이 그다지 시원하지 않아서인지 토마토가 생각보다 빨리 물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녁 식사 전 간식으로 토마토 하나를 씻어 먹었습니다. 물론 주변 환경에 대해서 불평해선 안 됩니다. <베어 그릴스>는 이 때문에 소중한 프로그램이지요. 극한 상황을 접하면 그때야말로 본연의 지혜를 사용해서 상황을 개선해나가는 것이 재미이니까요. 6시가 되어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나니 어느새 창밖은 어두워졌습니다. 홍콩중문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후배와 줌 회의 방식으로 통화를 하고 가족들과도 안부 인사를 마친 뒤 스쿼트와 팔굽혀펴기까지 하고 침대에 눕습니다. 저녁 9시가 넘자 배가 고파 오지만, 16:8 간헐적 단식이 깨진 마당에 야식까지 먹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태국만큼이나 좋아하고 살고 싶은 곳 가운데 하나가 일본입니다. 후쿠오카와 같이 잘 정비된 지방 도시도 좋고, 타코야키가 맛있는 오사카도 좋고, 시부야와 하라주쿠가 있는 도쿄도 좋습니다. 2019년에 도쿄와 쿄토로 출장 갔을 때 무한리필 낮술을 즐겼었는데, 마침 그 때의 추억을 자극하는 영상이 있어 몇 번씩 돌려보았습니다. 이 영상을 공유하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3dsdYNqGck

매거진의 이전글 210813 홍콩 자가격리 6일 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