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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5-2 성문 저수지(컨트리 파크) 후기

츈완 역 근처 도삭면(칼면) 맛집에서 든든하게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저는 이제 다시 지하철역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침 홍콩중문대학 박사과정에 있는 후배와 곧장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본디 1시 반 약속이었는데 2시 반으로 미뤄졌으니, 등산을 시작하기에는 다소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미니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니, 마침 82번 버스가 대기 중이었습니다. 저희가 타자마자 출발했습니다. 10분 정도 이동했을까, 성문 컨트리 파크 입구에 도착합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면, 우리 관광객들은 따라서 내리면 됩니다. 

오늘은 <성문(shing mun) 저수지> 주변을 한 바퀴 도는 2시간 반 가량의 코스를 타기로 합니다. 물론 이때까지는 우리가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될지 전혀 몰랐습니다. 사실 뭐, 곤경이랄 것도 없습니다. 저는 온종일 재미있었으니까요. 제가 홍콩에 1년가량 살게 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단기간의 홍콩 여행에서 이곳을 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터입니다. 홍콩에 장기 거주하는 한국인들끼리는 네이버 카페 등에서 만나 하이킹을 많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네이버 블로그나 유튜브 등에서는 성문 저수지 하이킹에 대한 내용이 드물었습니다. 아마 홍콩에 사는 한국인들의 경우에는 하이킹을 주제로 한 블로그나 유튜버를 즐기는 분들이 드문 모양입니다(없지는 않습니다). 뭐, 포스팅이 적으면 제가 또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버스에서 내려 저수지 쪽을 바라보는 상태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이제 성문 저수지 둘레길 산책로가 시작됩니다. 사실 모두들 그쪽을 향하기 때문에, 굳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2021년 9월 현재, 홍콩 공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은 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최근 홍콩 정부의 지침을 보면, "For the purpose of the mandatory mask-wearing requirement, all public places, save for outdoor public places in country parks and special areas as defined in section 2 of the Country Parks Ordinance (Cap. 208), a person must wear a mask at all times."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문 컨트리 파크에서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고 있나 봅니다. 제가 성문 컨트리 파크(저수지를 중심으로)에 들어가서 놀란 것은, 흙을 밟을 필요가 없이 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사람이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4시간 이상을 걸었는데 흙을 밟지 않았고 조금 깊이 들어가니 사람을 전혀 만날 수 없었습니다. 홍콩 기준으로는 교외여서 그런 걸까요? 조던 역에서 출발하여 지하철로 25분밖에 안 걸리는 장소인데 말이지요. 여하튼 저는 2020년 초반 코로나 시국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역사적인 2021년 9월 5일에 마스크를 당당하게 벗고 몇 시간 동안 마음껏 산속의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하이킹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해방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어제 침사추이 역 샹그릴라 호텔 근처의 바에서도 이미 코로나 시국이 끝난 듯한 분위기를 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마스크를 벗고 다니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겠지요. 저희는 성문 컨트리 파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 원숭이들을 보면서 계속 걸어갔습니다. 저수지의 풍경은 생각보다 대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냥 산속을 걷는다는 느낌 자체가 좋았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원숭이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구경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성문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사진도 찍어 봅니다. 


저수지 풍경은 대략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홍콩 성문 컨트리 파크의 경우에는 첫째, 이정표나 표지판이 정말로 불친절합니다. 둘째, 화장실이 매우 드물게 있습니다. 셋째, 결정적으로 와이파이가 잘 터지지 않습니다. 이 세 가지 콤비가 도보여행 후반에 저희를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길 자체는 평이했지만, 저희는 가다가 결국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저수지를 따라 빙 둘러서 복귀해야 하는데, 더 높은 트레일 러닝 코스로 계속 걸어 올라갔던 것입니다. 와이파이가 잡하지 않아, 구글맵으로 현재 위치를 특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정표들은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낮이 긴 홍콩의 하루를 믿고 무작정 걸었습니다. 사실 뭐, 여기가 에베레스트 산도 아니고 길을 잃어봐야 얼마나 헤매겠습니까. 다만 지나다니는 사람이 전혀 없어, 묻고 싶어도 물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소 떼를 바라보며 잠시 땀을 식힙니다. 

산책로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일단 코스 전체를 머릿속에 익숙하게 넣어 놓기만 하면 이곳을 다니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초행길에 구글맵을 믿고 갔다가는 정말로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걷다가 도중에 엄청난 폭우를 만났습니다. 소나기에 불과했지만, 아무래도 나무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옷과 신발이 흠뻑 젖었지요. 젖는 것 자체는 좋았습니다만, 이 습한 홍콩에서 나중에 신발을 말릴 생각에 골치가 아팠습니다. 현재를 살지 못하고 마음이 미래에 가 있으면 이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하지요. 그래도 뒤늦게나마 이런 생각이 미쳐서, 저는 비를 즐기며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30분이 넘게 오던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자,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윽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었지요. 미세먼지가 가득한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움 푸르름이었습니다. 자, 이제 우리의 결정적인 실수가 되어 버린 곳에 다다랐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shing mun reservoir로 돌아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needle hill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주식 투자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악재가 아닌 불확실성이지요. 악재도 일단 알고 다면 "해소"되어 호재가 됩니다. 악재가 발표되었는데 오히려 주가가 뛰는 경우도 있지요. 산속을 헤맬 때 불확실성은 가장 멘털을 흔드는 악조건으로 작용합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저는 마스크를 벗고 등산하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큰 고민 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폐가라고 불려도 마땅한 어느 오두막 근처에 다다라서 땀을 식혔습니다. 지도를 봐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지요. 다만 저는 성문 저수지 쪽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여하튼 우리는 결국 더 높은 곳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둘이서 함께 내린 결정이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요. 걸어서 올라가도 끝이 나지 않는 코스를 따라가다, 우리는 오늘의 천사라고 불릴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 50대(로 보이는) 부부는 트레일 러닝 중이었습니다. 높은 장소에서부터 아래로 뛰어내려오는 중이었지요. 우리가 길을 물어보니, 단호하게 그들은 성문 저수지 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과 같이 계속 가다 보면 트레일 러닝 코스로 접어들게 되는데, 꽤나 험해서 지금 복장으로는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도 이미 오후 5시가 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산속의 저녁은 도심보다 훨씬 빨리 찾아오지요. 곧 어두워질 터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후배의 와이파이가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부부는 다시 힘차게 산길을 뛰어내려 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아예 웃통을 벗고 있었고, 스포츠브라를 한 중장년의 여성 또한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매우 탄탄한 허벅지를 지녔습니다. 사이좋게 뛰어내려 가는 부부를 보니, 제가 홍콩에 가져온 <본 투 런>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울트라 마라톤이나 트레일 러닝을 즐기는 이들 가운데 동양철학에 흠취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심플 라이프, 미니멀 라이프, 현재에 집중하는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한국의 동양 철학자들 가운데 이와 같은 현실에 눈길을 주는 이들은 드뭅니다.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으로 실적 쌓기에 바쁜 이들이 진짜 현실에 관심을 가질 시간은 드물겠지요.  


이제 불확실성은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게다가 내리막길입니다. 발걸음이 가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산길에서야 성문 저수지의 아름다운 전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압권은 하산 끝무렵에 만난 야생 원숭이 떼입니다. 아기 원숭이를 배에 매달고 걸어가며 나무 위까지 뛰어오르는 어미 원숭이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비로소 오늘 출발 장소였던 성문 컨트리 파크 미니버스 82번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홍콩 미니 버스는 보통 16~19인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대를 보내고, 또 다른 차량을 기다렸습니다. 생각보다 대기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20분 이상은 기다린 듯합니다. 프리 와이파이가 기적적으로 잡힌 가운데, 한국에 있는 매제에게서 줌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귀가해서 통화하기로 합니다. 

드디어 미니버스 82번이 도착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7시 반입니다. 츈완 역까지 가는데 미니버스 앞자리에 앉은 청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땀에 젖은 티셔츠를 훌렁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완전히 상의탈의 상태였지요. 이제 이런 풍경도 익숙해져야 하나 봅니다. 


츈완 역에 내려서 저녁 식사를 하고 가기로 합니다. 구루메 앱을 찾아보니, <HeSheEats>라는 레스토랑이 많이 추천되어 있습니다. 배가 잔뜩 고픈 상태라, 국수보다는 고칼로리의 서양식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에 이곳으로 선택합니다. 사실 음식보다는 목이 너무도 말라 물을 빨리 마시고 싶었습니다. 

쇼핑몰 내에 위치한 <HeSheEats>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잠시 멈칫했습니다. 이곳이야말로 샤방샤방한 대학생 커플이 와서 알콩달콩 데이트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자가 전부 분홍색에 가게 벽면에는 하트가 달려 있었습니다. 심지어 냅킨에도 하트가 뿜뿜했지요. 우리는 비를 쫄딱 맞은 거지 꼴의 30, 40대 아저씨들이었죠. 하지만 다른 곳을 찾을 여유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테이블에는 한국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다란 물병이 자리 잡고 앉아 있었지요. 적지 않은 홍콩 식당에서 물은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일단 앉고서 물을 마음껏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이제야 좀 살만 했지요. 치즈가 듬뿍 들어 있는 수제 햄버거에 프렌치 프라이를 추가 주문하고서 앉아 기다렸습니다. 만드는데 15분이 걸린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더 걸렸습니다. 게다가 에어컨이 어찌나 세었는지, 비에 흠뻑 젖은 우리 둘은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가 내일 감기 기운이라도 있으면 큰일인데 말이죠. 마침내 햄버거 세트가 나왔습니다. 

제가 너무 배가 고파 서일 까요? 개인적으로 정말 끝내주게 맛있는 수제 버거였습니다. 저는 햄버거를 한꺼번에 베어 무는 대신, 하나하나 분리해서 먹는 편을 즐깁니다. 재료 각각의 맛과 신선함을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수제 버거의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너무 덩치가 크기도 하고요. 그런데 정말로 재료 하나하나가 신선하고 맛있었습니다. 프렌치 프라이야 맛이 없을 수가 없고, 옆에 곁들여진 채소 또한 소스에 잘 버무려져 있어 좋았습니다. 8시 50분이 되자, 종업원이 명세서를 들고 왔습니다. 9시에 영업 마감인 듯합니다. 식사와 계산을 마치고 나오니 속이 든든한 게, 못할 일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헤어져야죠. 후배는 시내버스를 타고 중문대학교로 이동했고, 저는 다시 레드 라인을 타고 조던 역에 내렸습니다. 콜라 한 캔을 사 마시고 싶었지만, 이미 과식한지라 참았습니다. 귀가하자마자 오늘 입었던 옷들과 신발을 들고 다시 세탁실로 향했습니다. 졸음이 쏟아져 죽을 지경이었지만, 비에 젖은 빨래들을 방치하고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15분 쾌속 빨래 및 건조로 오늘 태스크를 마무리하고 샤워까지 마친 뒤 침대에 누웠습니다. 이대로 자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곯아떨어졌습니다. 이렇게 일요일이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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