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211127 홍콩의 재즈 카페, 비사지 원

11월 27일 토요일, 저는 오전부터 센터(사무실)에 나와서 제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홍콩에서는 타인의 일요일이 제 토요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토요일에 쉬고 일요일에는 센터에 나와 일하기로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나면, 첫째, 홍콩은 페리를 비롯한 모든 교통요금이 일요일과 공휴일에 상승합니다. 둘째, 시티 라이프를 즐기기에는 일요일보다는 토요일이 좋습니다. 홍콩을 방문하셨던 분이라면,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 란콰이펑 전역에 넘쳐나는 바이브를 기억하실 겁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코로나 시국에 잘 대처하고 있는 홍콩은 사실상 서양인들 놀이터의 경우에는 이미 코로나가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토요일에 센터에 나와 있는 것일까요? 트래킹을 할 것이 아니라면, 오전과 오후 시간에는 돌아다녀봤자 별 재미가 없습니다. 이미 관광객에게 유명한 곳들은 거의 다 가 보았고, 쇼핑은 제 취미가 아닙니다. 해변을 하이킹할 것이 아니라면, 역시 도시는 밤이죠. 그래서 저는 오전과 오후에는 좁아터진 제 호텔을 벗어나서 널찍한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가, 오후 늦게 출격합니다!


각설하고, 저는 오늘은 어디를 가볼까 하고 검색하다가 매우 제 흥미를 돋우는 장소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https://hongkongfreetours.com/visage-one/

평일에는 헤어샵으로 운영되다가, 토요일 저녁에만 재즈 공연장으로 바뀌는 신비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다만 이 헤어샵 오너의 인터뷰가 번역되어 실린 네이버 블로그가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https://zepero.com/1654?category=305090

홍콩 독거노인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합니다. 홍콩에는 멋진 재즈바가 이곳 이외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아~~~~주 "엘레강스"한 분위기에서 정장을 차려 입고 귀족스러운 분위기에서 고급 연주자들의 연주를 "감상"해야 하죠. 저는 이런 분위기는 딱 질색입니다. 매년 방문했던 방콕 카오산 로드에서 제가 가장 즐겨 찾던 재즈 블루스 공연 장소는 <애드히어 adhere the 13th blues bar>입니다. <비사지 원>은 <애드히어>와 분위기가 비슷할 듯합니다.

https://kyobolifeblog.co.kr/2645 

오늘 점심식사는 한국 즉석라면으로 해치웠고, 저녁은 돼지고기와 채소를 얹은 간장밥(?)으로 간단히 마무리했습니다. 7시 15분에 사무실을 나섭니다. 8시 반 공연인데 8시에는 가야지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홍콩에서는 이와 같은 공연장에 적어도 30분 이상 일찍 가야만 3시간 공연 동안 강제 스탠딩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거든요.

언제나처럼 센트럴 역 D2 출구를 나와 란콰이펑을 거쳐서 갑니다. 란콰이펑 꼭대기에는 "할리우드 로드(hollywood road)"가 있는데, 이 길을 쭉 따라서 가다 보면 <비사지 원>이 나옵니다. 사진으로 보면 저녁 8시가 가까운데 아직 한적하죠? 홍콩 젊은이들은 저녁 10시는 되어야 그 때부터 시작입니다.  계단길을 타박타박 올라갑니다. 이 골목의 끝에는 양옆으로 멋진 라이브 공연장이 있습니다. 특히 사진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세계 곳곳에 지점이 있는 <아이언 페어리 The Iron Fairies> 홍콩 지점이 있습니다. 아마 저처럼 태국 여행을 즐기시는 분들은 <아이언 페어리 방콕>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곳도 조만간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 맞은편에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노천 바가 있는데, 유달리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이유가 있겠지요? 그곳도 가야죠. 


구글맵을 참고하여 할리우드 로드를 따라 쭉 걸어갑니다. 관광객들에게는 익숙한 할리우드 벽화, 제게는 익숙하지만 그래도 브런치를 읽어주시는 독자분을 위해서 찍습니다. 사실 보고 또 봐도 마음에 들어서 찍는 것입니다.^^  

언제쯤이나 도착할까 했는데, 아! 단 한 번 와봤지만 제게 매우 인상 깊었던 바로 그 계단골목(Shin Hing St.)에 <비사지 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 11월 12일 금요일, 산업은행 동기들과 베이징 덕을 먹은 뒤 2차로 이 골목에 와서 야장을 깠습니다.(야장을 깐다=야외에서 술을 마신다)

저 계단 양옆으로는 홍콩에서 가장 핫한 바들이 즐비하고, 계단에는 주로 서양인들이 서거나 앉아서 와인을 마십니다. 밤새도록 이어지는 광경이지요. 이태원에서도 접하기 어려운 멋진 광경입니다. 저녁 8시경이어서 한적합니다만, 10시가 넘어서면 저 계단에 사람들이 제법 많이 앉아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아뿔싸! 그런데 이놈의 재즈바가 어디 숨어 있는지 찾는 일이 보통이 아닙니다. 분명히 구글맵에서는 다 왔다고 알려주는데 보이지를 않습니다. 

저렇게 빌딩 안에 소재한다고 적혀 있기는 하지만, 빌딩의 입구 철제 문은 모두 잠겨 있습니다. 이럴 때는 긴장을 풀고 또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참고로 저기 <싱흥유엔>은 아주 유명합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보시다시피, 건물 밖에 상호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제가 잘 찾아온 것일까요?

저 빨간 책자가 놓인 테이블 위에 매의 눈으로 째려보아야 알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visage one"이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그래, 알았어. 찾아올테면 찾아와보라는 자세라 이거지? 아주 마음에 들어!" 저는 이런 집이 좋습니다.

<비사지 원> 바닥은 목욕탕 타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이 곳은 평일에는 헤어샵이다가 토요일 저녁에만 공연장으로 탈바꿈합니다. 이 때문에, 술이나 음료, 음식 등을 전혀 판매하지 않습니다. 제가 입장하자, 상기한 블로그에서 인터뷰를 했던 주인장이 저를 친절하게 맞아줍니다.

 공연 관람료는 HKD 100(15,000원)입니다. 제가 혹시나 싶어 술을 파느냐고 물으니, 외부에서 사서 들고 와서 마시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제게 오늘 처음 오셨는데, 자기가 지닌 와인을 한 잔 선물하겠다고 하십니다. 아, 이게 레알입니까? 잠시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솔직히 이 글을 쓰지 말까 하고 불경스러운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어째서냐? 이 좁디 좁은 보물과도 같은 장소가 유명해지면, 뭔가 지금의 시스템이 바뀌거나 심지어 이 공연장이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물론 농담입니다. 좋은 곳은 많이 공유해야죠) 아시다시피 홍콩의 물가는 한국보다 훨씬 비싸며, 참새 눈물만큼의 양이 담긴 맥주 한 병을 펍에서 마셔도 1만원은 넘게 듭니다. 분위기가 좀 좋다 싶으면 칵테일 한 잔에 2-3만원은 훌쩍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 곳은 멋진 라이브 재즈 공연을 보면서도 내가 가져온 와인을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듣도 보도 못한 장점이 있습니다. 솔직히 한국에서도 이런 곳을 찾기는 어렵지요. 대림역 차이나타운의 중국집들이 예전에는 술을 가지고 와서 마시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여하튼 홍콩 독거 노인이 매주 토요일 술은 당기고 딱히 갈 곳이 없을 때 주저앉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마침내 찾은 듯합니다.  


여기는 연주자들이 자주 바뀝니다. 꽤나 유명한 뮤지션들이 깜짝 방문해서 연주하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은 아마추어 뮤지션들인 듯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열정과 활기가 넘치지요. 기타를 손에 든 저 서양인은 그래도 이 곳에서 꾸준히 연주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는 전문 연주자인데, 오늘 보컬도 그의 제자입니다. 흥미롭게도, 오늘 보컬(사진에서 뒤통수가 보이는 분)은 대만 출신입니다. 그래서인지 좁디 좁은 헤어샵 공연장에 대만인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복장을 보고 제가 좀 부끄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츄리닝 반바지에 바람막이 잠바를 입고 뮤지션들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마주보고 앉아 있었거든요. 그래도 주말인지라 대만인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온 서양인들은 정말로 멋지게 차려 입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물을 흐리는 기분이었지요. 다음에 올 때에는 저도 자켓에 면바지 정도는 걸치고 와야겠습니다.

공연장 2층 사진입니다. 시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직 공연이 시작되기 전입니다. 공연이 시작되고 나면 2층은 물론이요 계단까지 사람이 꽉 들어차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탠딩으로 관람합니다. 심지어 헤어샵 바닥에 주저앉아서 공연을 감상하더라고요. 물론 공연 전에 바닥을 깨끗이 청소했겠지만, 저는 아직까지 미용실 바닥에 앉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그려.

역시 공연 전 사진입니다. 공연이 일단 시작되고 나면 사진 찍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1층에서는 그렇습니다. 레퍼토리는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재즈 스탠다드였습니다. 보컬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공연했는데, 그래서인지 대만 친구들과 가족들이 매우 많이 이 곳에 자리했습니다. 중국과 대만의 대립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 곳 분위기는 잊지 못할 만큼 흥미롭습니다. 심지어 대만 유행가 몇 곡을 연주하기도 했으니까요. 마치 독립운동을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홍콩이 "아직까지는" 그래도 살 만합니다.

<Fly me to the moon>을 듣는데 청승맞게 눈물이 잠시 나왔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럿 한국에 있습니다. 제게 소중한 그 사람들이 "달에 간 것마냥" 즐겁도록 제가 그동안 배려하고 살았는지, 회의감이 밀려왔습니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디 갈랜드(Judy Garland)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영화 <주디>가 떠오르기도 했고...결국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은 폭력과 악이 없는 그 곳입니다. 만약 인간 본성이 악하다면, 본성상 저와 같은 이상향을 꿈꿀 리가 없겠지요. 만약 성악설이 옳다면 모든 인간들은 자기 본성상, 여자친구를 19번 그리고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18번 33cm 부엌칼로 찔러 살해한 살인범을 칭찬하고 격려해야겠지요. 왜냐하면 자기 본성대로 충실하게 잘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암사동 모녀 살인사건>이 우리 인간 본성에 반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건을 비난합니다. 아울러 <암사동 모녀 살인사건>에서는 심신미약을 이유로 감형을 주장했다가, 몇 년 뒤 유사한 살인사건에서는 심신미약을 이유로 한 감형을 소리높여 비난하는 어떤 변호사 출신 전과 4범 대선후보의 "내로남불"을 "인간 본성상" 옳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내로남불은 참으로 "좀스럽고 민망합니다만," 그것이 폭력적이거나 위협적이라는 느낌은 딱히 없습니다. 하지만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그 분의 내로남불은 정말로 섬뜩합니다. 아마 내로남불의 최종진화형이 아닌가 합니다. "살인"과 "내로남불"은 모두 악하다고 규정됩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에 어긋나서 우리의 감정을 뒤집어 놓기 때문"입니다.


공연장에서는 잡담 금지입니다. 하지만 청중들의 떠들썩한 환호성과 가져온 와인병을 "엎지르는" 소리, 그리고 잔을 부딪는 소리, 보컬이 스페인어 가사를 까먹었을 때 격려해주는 친우들의 목소리 등으로 연주장은 떠나갈 듯 시끄럽습니다. 11시가 조금 넘어 모든 공연일정은 끝났습니다. 이제 친구와 가족들끼리 뒷풀이 시간이겠지요. 홍콩 독거 노인은 이쯤에서 슬그머니 가게를 빠져나와야겠습니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서 란콰이펑을 거쳐 걸어갑니다. 와우, 온 가게마다 음악이 빵빵 터져 나오면서 서양인들이 궁둥이를 신나게 흔들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이런저런 펍들도 방문해보아야겠습니다. 하지만 지하철 막차를 놓치면 귀찮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211124] 홍콩 케인로드 스타벅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