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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홍콩대 오케스트라 정기공연

2021년 11월 22일 월요일, 많은 분들이 "월요병"에 걸려 괴로워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저는 엉뚱하게도 홍콩에서는 월요병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요일부터 일주일을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뭐 그렇다고 해서, 일요병이 있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닙니다. 호텔에 있기 싫어서 제 발로 센터에 나오기 때문에, 딱히 힘들거나 억울할 일도 없습니다. 여하튼 저는 월요일에도 그냥 별다른 저항감 없이 사무실로 나섭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특이합니다. 저는 9월 1일부터 홍콩시티대학에서 근무 중인데,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는 저녁 약속을 잡은 적이 없습니다. 금요일에도 사무실에서 술을 마실지언정, 따로 어디를 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다릅니다. 저는 홍콩에 있는 기간까지는 제 스타일로 경험해볼 수 있는 것들은 가급적 다 겪어보고 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약 일주일 전인 일요일, 홍콩대학교 캠퍼스에서 산책하다가 홍콩대학교 학부 오케스트라 정기공연이 홍콩시청에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 번 가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HKD140의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사이트에 들어갑니다. 아무래도 신규가입을 해야 하기에,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칩니다. 하지만 가장 황당한 것은, 티켓이 바로 인터넷에서 출력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우편을 통해서 티켓을 수령하든가, 아니면 사이트가 지정해놓은 몇몇 장소에 가서 기계에서 직접 티켓을 출력해야만 합니다. 우편의 경우에는 배달료가 HKD50입니다. 반면에 직접 수령하면 비용이 들지 않지요. 마침 침사추이에 있는 여러 박물관들에 이 기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퇴근길에 티켓을 수령하러 갑니다.

요렇게 생긴 기계에다가 신용카드를 옆으로 슥! 긁으면 티켓이 출력됩니다. 그런데 더럽게 인식을 못해서, 몇 번씩이나 긁었습니다. 마침내 티켓이 출력되었는데, 수수료가 HKD8입니다. 그래, 알았다. 이게 바로 홍콩 문화이구나. 어차피 한국 인터파크 등에서 티켓 구매를 해도 수수료는 붙으니까요. 

이렇게 티켓과 수수료 영수증이 동일한 포맷으로 같이 출력되는 것이 매우 신기했습니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여기까지. 이제 콘서트 전날까지 틈틈이 공연 레퍼토리를 유튜브로 들으면서 살사 감을 익혀야겠지요. 


월요일 6시에 퇴근하자마자, 곧바로 센트럴 역으로 향합니다. 시청 콘서트홀에 도착하니 7시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오래되어 고풍스러운 콘서트홀은 매우 좁아서, 앉아서 대기할 만한 장소가 딱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건물을 빠져나와, 콘서트가 시작하기 전까지 바깥바람을 쐬기로 합니다.

 

시청 콘서트홀 맞은편에는 장국영이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그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4월 1일 만우절, 거짓말처럼 그는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24층에서 몸을 던졌지요. 해마다 4월 1일 즈음해서 호텔 앞에 그를 애도하는 꽃다발이 쌓인다고 합니다. 아마 내년에는 제가 바치는 꽃 또한 현관에 있겠지요.

홍콩 IFC몰에 자리한 애플 매장의 사과 문양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 조카가 소유한 애플 주식도 저와 같이 환히 빛나길 바랍니다. 

홍콩 침사추이 쪽에서 바라보면 제일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보험회사 AIA의 문양이 박힌 회전관람차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는데, 고맙게도 운이 닿아 이렇게 근접 촬영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저 회전관람차는 조그마한 유원지의 일부였습니다. 회전목마도 있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터도 잘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홍콩의 연인들이 대담하게 입을 맞추는 장면도 여럿 보였습니다. 그 외에 센트럴 역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책로에서 조깅을 하는 이들이 꽤 눈에 들어왔습니다. 침사추이 근처에 산다는 행운을 누리면서도, 제 마음은 여전히 홍콩 섬의 도회적인 분위기에 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여기에 호텔을 정하면, 퇴근 후에 운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저를 잘 아는데요, 뭐. 


클래식 공연장에는 항상 몇십 분 일찍 입장해서 기다려야 하지요. 그래서 서둘러 2층 관람석에 자리 잡았습니다. 공연 중에는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지요. 제가 홍콩 관련 글을 쭉 쓰다 보니까, 정작 메인이벤트에 관한 사진은 별로 없고 그 외 사진만 가득하더군요. 메인이벤트는 찍는 게 아니라 즐겨야죠. 

홍콩대학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다양한 학과의 학생들 및 졸업생들, 그리고 교수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입니다. 지휘자가 의대 교수시더군요. 그는 피아니스트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등의 솔로이스트는 국제 콩쿠르에서 다수 수상 경력이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솔로이스트가 영국의 이튼 스쿨 출신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이 학생들은 진정 글로벌한 이미지를 지녔습니다.  


다양한 곡이 연주되었습니다만, 저는 역시 제일 먼저 등장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에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 구매한 클래식 앨범이 바로 라흐마니노프 본인이 직접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3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라흐마니노프는 제가 사랑하는 작곡가이자 연주자입니다. 한 때 라흐마니노프는 "구태"라고 취급받았습니다. 온갖 실험적인 음악이 난무하는 20세기에, 19세기 풍의 낭만 음악을 고집했으니 말입니다. 시대에 뒤쳐진 골동품 취급을 받았던 라흐마니노프는 190cm가 넘는 키에 상상도 하지 못할 사이즈의 손을 가졌는데, 그 놀라운 감성과 테크닉을 바탕으로 놀라운 연주들을 남겼습니다. 많은 이들은 호로비츠를 위시한 여러 전문 연주자들의 라흐마니노프를 즐겨 듣습니다. 저 또한 호로비츠의 1978년 뉴욕 카네기홀 라흐 3번 연주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연주는 오늘날의 솔로이스트가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런 "귀족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라흐마니노프 본인이 바로 "러시아 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귀족적인 분위기를 상상하면서 연주하는 21세기 솔로이스트는 아쉽게도 실제 귀족인 연주자의 그 고풍스럽고도 고집스럽고 그러면서도 아련하고 가슴을 두드리는 분위기를 낼 수 없습니다. 이는 감성의 부족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귀족으로 살아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귀족 분위기로 연주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연주는 정말로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오늘 홍콩대학교 학부생(음대생이 아닌 의대생)의 연주는 그 열정만으로도 제게 충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영국 런던의 타워레코드 본점에서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CD를 발견하고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했던 1997년 여름 대학교 2학년 때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나머지 플루트 연주 및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2번 연주는 그만큼은 못했지만, 그래도 연주자들의 열정이 돋보여서 마지막까지 흥미롭게 감상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 이제 꽃다발을 든 가족들이 멋진 공연복을 입은 연주자들을 반깁니다. 홍콩 독거노인은 오늘도 이 소란한 광경을 뒤로하고 홀로 빠져나와 귀가합니다. 지금과 같은 일상이 계속된다면, 아마 홍콩 현지에서 친구를 사귀기란 쉽지 않을 듯합니다. 하지만 홍콩이라는 도시는 저와 같이 혼자 떠도는 이방인들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센트럴 피어에서 페리를 타고 침사추이 쪽으로 넘어가려 헀지만, 무슨 일인지 오늘은 페리가 일찍 운항을 마쳤습니다. 별 수 없이 다시 센트럴 역으로 걸어가 지하철을 탑니다. 홍콩에서 1년 동안 근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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