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사토리 세대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1

우리 논의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던 아사히신문 기사는 한 사토리 세대의 장래희망을 묻고 듣는 것으로 끝난다.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에 그는 타인에게 너그럽고 관용을 베푸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 기사의 또 다른 사토리 세대 청년은 ‘어느 정도 보기 좋게 힘이 빠진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어느 정도 보기 좋게 힘이 빠진 어른이란 대답을 한 젊은이는 결코 대충대충 살다 가는 무기력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뜻으로 그렇게 답한 게 결코 아니다. 그는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대답했을까? 보기 좋게 힘이 빠진 대신, ‘보기 나쁘게 힘이 들어간’ 어른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왜 그런 어른이 되기 싫었을까? 그에게 있어, 어떤 어른이 보기 나쁘게 힘이 들어간 사람일까?

이 질문은 앞선 문답과 관련해서 ‘보기 나쁘게 힘이 들어간 어른이 곧 너그럽지 못하고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어른’이라는 이해를 통해서만 올바로 답변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떨 경우에 보기 나쁘게 힘이 들어가는가? 우리는 사토리 세대가 냉소주의에 빠져서, 자기가 진정 좋아하는 일을 힘차게 하고 있는 인물을 두고 “뭐 저렇게 힘을 들이고 앉아 있지? 오버하고 있네.”라고 비아냥거린다고 이해해선 절대 안 된다. 자기 일을 신나고 즐겁게 하는 이가 ‘보기 나쁠 수’ 있는가? 자기가 원하지 않지만 회사가 원하는 일, 자기는 죽어도 하기 싫은데 회사가 시키니 억지로 하는 일을 할 때 보기 나쁘게 힘이 들어간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가서 대체적으로 보람차게 일하다가도, 가끔씩은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드문 경우를 두고 사토리 세대가 보기 나쁘게 힘을 쓴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나의 예를 들어보자. 나는 처음부터 은행 업무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다만 정년이 보장되고 일이 편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국책은행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너무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 ‘보기 나쁘게 힘을 쓰고’ 있었다. 그 직장에 오래 있고 싶기도 했지만, 나를 배려해주는 좋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사람의 정(情) 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 정(情)은 보기 나쁘게 힘을 쓰면서 평생을 살 수 없다는 점을 끊임없이 내게 인식시켰고, 결국 나는 그곳을 그만두고 나와서 인문학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내가 은행을 다니던 당시 누가 나를 보아도, 은행과 맞지 않는 사람이 애써 힘겹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느꼈을 것이다. 나는 보기 나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정도껏 보기 좋게 힘이 빠진 어른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던 일본 청년 또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의 말이 좀 더 절실히 와 닿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대답인 것 같지만, 저 안에 저 청년의 수많은 고민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제 이 문제를 ‘보기 나쁘게 힘이 들어간 어른이 곧 너그럽지 못하고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어른’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들여다보자. 나는 앞선 논의에서 지금까지 분석된 사토리 세대의 특징들이 모두 하나로 꿰어지며, 그 핵심에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들의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미 무한경쟁을 해보았자 행복하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으며,’ 경쟁을 통해 상대방에게 잔인해지기보다 차라리 자기 자신의 현재 삶에 만족하면서 상대방에게 너그러운 편이 행복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들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면서 행복함을 느끼고, 필요 이상으로 소비하기 위해 상대방과 경쟁하는 대신 상대방에게 너그럽고자 한다. 따라서 나는 능동적 사고방식이야말로 물질만능주의와 무한경쟁주의를 끝낼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다른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회는 경쟁사회이며, 오직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다행히 내가 공부를 썩 못하는 편은 아니라서, 어른들이 ‘경쟁심’을 내게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경쟁사회의 원칙에 따라 남을 이기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왜 내가 남들을 이기고 남들은 내게 져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남들을 이겨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들에게 졌을 때 속상했는데, 내가 남들을 이기면 내게 진 사람들이 분명히 나처럼 속상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도 속상하지 않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고 싶었는데, 어른들이 말하는 ‘경쟁’을 통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는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누군가 속상한 건 당연하지. 원래 경쟁사회가 그런 건데, 너는 경쟁사회 속에 살면서 그런 것도 모르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첫째, 자신은 절대 속상한 일을 당할 리 없다고 여기는 기득권은 경쟁사회를 찬양한다. 왜냐하면 수십 억 명의 사람들이 속상하더라도 자기는 속상하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멍청한 생각이다. 둘째, 경쟁사회 속에서 속상한 건 당연한데 그렇다고 해서 경쟁사회를 떠날 수도 없으니 그냥 자포자기하고 냉소하며 살아가자는 부류 또한 있다. 아마 이 두 부류는 수동적 사고방식의 양 극단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악순환을 빠져나가는가?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경쟁사회 속에서 속상하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나는 많은 고민 끝에, 인간사회는 마땅히 ‘경쟁사회’ 여야 하며, 다른 사회는 있을 수 없다는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경쟁’만이 이 사회를 유지시킬 수 있으며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나아가서 진정한 창의력,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하는 창의력은 결코 타인을 속상하게 만드는 경쟁을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생각에서부터 나온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는 경험적으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하다. 고흐는 자기가 즐거워서 그림을 그렸을 뿐, 남들을 밟고 올라서기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즐거워서 상대성 이론을 밝힌 것이지, 결코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 그 이론에 몰두한 것이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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