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220531 홍콩 몽콕 쌀국수 <귀향원>

2022년 5월 31일,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홍콩은 한자로 향항(香港)입니다. 향기 '향'에 항구 '항'이지요. 향을 실어나르는 항구였다는 데서 기인한 이름이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향기 나는 항구"로 이해됩니다. 제게도 그렇습니다. 비록 시진핑 공산당 정부에 의해 갈수록 중국화되면서 홍콩 특유의 분위기를 잃어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 세대에는 멋지고 아련한 향수를 풍기는 곳입니다. 어째서일까요?


바로 2022년에도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장국영"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름다웠던 80년대와 90년대, 제 삶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주윤발, 유덕화, 장국영, 양조위 등의 배우들이 활약했고 지금도 대부분 활동하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지금 홍콩의 20대 젊은이들보다 제가 옛 홍콩을 더욱 사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 40대 영화팬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제가 올해 들어 가장 후회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4월 1일 만우절에 장국영을 기리지 못한 것이지요. 장국영이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홍콩 오리엔탈 만다린 호텔에는 장국영의 기일을 전후해서 팬들의 추도가 이어지는데, 코로나 시국이라 제가 그만 깜빡하고 말았습니다. 사죄의 뜻으로 장국영 투유 CF 영상 첨부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9BOsItHApk


제가 홍콩에 살기 시작한 작년 9월, 저는 처음부터 운남성 스타일의 쌀국수에 꽂혀 있었습니다. 침사추이의 유명한 <성림거>를 제집 드나들 듯 했고(침사추이에 2달 가까이 살았고, 그 외에도 성림거와 도보 20분 거리에 거주했습니다), <탐자이 삼거>나 <남기 국수> 등을 꾸준히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홍콩에 살기 시작한 초기, 몽콕 역에 소재한 <남기 국수>를 찾으려다 결국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남기 국수> 몽콕 점이 2층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요. 워낙 간판들이 촘촘하게 꽂혀 있었는데다가 아직 스마트폰 개통 전이라 구글 맵도 사용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지쳐서 결국 근처 눈에 띄는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완전히 만족했습니다! HKD 29의 저렴한 가격에 제 입에 딱 맞는 쌀국수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깨끗하지만 좁은 가게 안이 북적였던 것으로 보아, 아마 현지인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나 봅니다. 대놓고 관광객 포스를 내는 저를 보고 웃는 손님들도 있었지요. 1년을 살고 나니, 이제 저에게 광동어로 말을 걸고, 찌라시도 편하게 돌리더군요. 현지인화 되었나 싶더니, 떠날 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 가게의 위치는 제대로 파악했지만, 가게 이름은 까먹고 말았습니다. 한동안 그 가게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살았는데, 몽콕 <남기 국수>를 여러 차례 방문하다 보니 그 가게 생각이 다시 났습니다. 그래서 5월 31일, 그곳을 다시 찾았습니다.   


<남기 국수> 몽콕점과 10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이 운남식 쌀국수 가게는 <귀향원>입니다. 홍콩의 "향"이 가게명에 들어 있어 더욱 마음에 듭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홍콩에 처음 도착해서 모든 것이 마냥 새롭던 그때 기분이 다시 솟아오릅니다.

제가 조금 이른 시간에 와서 그런지,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좋아! 주인 아주머니는 그대로이고 종업원은 바뀌었네요. 그 때에는 너무 정신이 없고 혹시 소매치기라도 당할까 봐 잔뜩 날이 서 있었는데(여권을 들고 다니던 시절입니다), 지금은 내 집처럼 편안히 앉아서 주문합니다.

메뉴 맨 위에 HKD29 기본 메뉴가 보이죠? 아래에 보면 다양한 재료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 메뉴에도 이미 돼지고기와 야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저는 별도의 재료를 넣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가게 국물 맛이 가장 제게 맞았습니다. 추가 재료를 넣어서 국물 맛을 달리 할 필요가 없었지요. 시큼하고도 매운 맛이 아주 잘 조화되어 있습니다. <성림거>보다 낫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냥 봐도 국물이 진해 보이지요? 한국에서는 절대로 접하지 못할 맛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홍콩 로컬 음식들 대부분은 기름지고 독특한 향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꾸준히 매일 먹을 수는 없는 스타일입니다. 하지만 중국 본토 풍이라는 사천식이나 운남식 요리는 정말 맛있습니다. 일단 매우면 믿고 먹을 만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번에는 중간 매운 맛으로 시켰는데, 다소 제게는 강했습니다. 다음 번에는 맵기를 한 단계 낮춰야 하겠습니다. 고수 향이 진하게 배어 있기 때문에, 저와 같이 고수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주문할 때 미리 언질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종업원이 영어를 알아들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죠. 원래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은 온통 한자에다 메뉴판에 그림까지 없어야 하고, 관광객이 영어로 주문하면 사장이 눈만 껌뻑거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가게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그냥 줄이 길게 서 있는 가게를 찾으면 되지요. 우리는 아마추어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 참고로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그냥 구글 켜놓고 한국어로 말하면 광동어로 번역되어 나옵니다. 해외에서 택시 타고 목적지를 기사에게 알려줄 때, 이보다 유용한 기능이 없더군요.   


이른 저녁을 마치니, 6시가 아직 안 되었습니다. 사무실에 가서 할 일도 있고 하여, 또 천천히 홍콩시티대학까지 걸어서 갑니다. 아이고, 숨이 턱턱 막힙니다. 가뜩이나 더운데, 몽콕 시장에 사람이 넘쳐나니 아주 생지옥입니다. 가까스로 인파를 뚫고 사무실에 도착하니, 벌써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습니다. 이를 꽉 깨물고 가장 급한 것만 처리해놓은 뒤 일찍 퇴근해서 빨래를 하기로 합니다. 저는 번화가인 조던 역 근처 호텔에 살고 있는데, 건널목 건너편에 있는 코인 빨래방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한껏 차려 입고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들 사이로 빨래 바구니를 들고 이동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을 부끄러워한다면, 홍콩에서 살 수 없습니다. 물론 제가 워낙 특이한 케이스이기는 합니다. 조만간에는 홍콩 시내 한복판에서 웃통을 벗고 달리기하는 아재들 가운데 제가 끼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220530] 홍콩 운남성 쌀국수<믹시안 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