Ⅸ.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분석해 보자-3

「작은 공동체 안으로 모이는 젊은이들」에 대한 분석

노리토시는 2장에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사회 지향’인가 ‘개인 지향’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내향적’을 ‘개인 지향적’과 동일시하는데, 결국 ‘사회’를 기준으로 해서 사회를 지향하지 않으면 ‘내향적’이자 ‘개인 지향적’이 된다. 우리의 앞선 논의를 통해서 볼 때, 이 또한 개인과 사회를 분리해서 다루고자 하는 기존 사회과학이론의 폐해를 노리토시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노리토시는 여전히 솔직했다. 왜냐하면 그는 “뭐라고 하면 좋을까. 참으로 ‘미묘’하다. 자료를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내향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 ‘내향적이 아니다.’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이런 ‘미묘한 느낌’이야말로 오늘날의 ‘젊은이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결국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가 처음부터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 개인과 사회를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전제한 다음, 다시 ‘개인적 성향’과 ‘사회적 성향’을 나누어 다루려다 보니, 결국 혼란에 빠져 ‘미묘’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혼란 및 미묘함은 비단 노리토시 한 학자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노리토시는 ‘개인적 성향’과 ‘사회적 성향’이라는 이슈를 다루면서, 30년 동안 꾸준히 이루어졌던 일본 내각부의 설문 조사를 참고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엘리트 공무원 및 그들을 돕는 학계 또한 이와 같은 이분법적 구도를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노리토시와 같은 젊고 독창적인 학자는 어찌 보면 이와 같은 학계 풍토의 희생자에 불과하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회성이 강한 반면에 요즈음 젊은이는 사회성이 약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많은 어른들 또한 이와 같은 이분법에 자신이 깊숙이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노리토시는 최근 몇 년 동안 ‘사회 지향’을 선택한 젊은이들이 급속히 늘어났으며 그들은 의외로 사회에 관심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회 공헌 활동에 참여하는 젊은이의 수는 그다지 늘지 않았다는 점에 의아해한다. 여기서 노리토시는 ‘사회에 대한 관심’과 ‘사회 공헌 활동’을 곧바로 연결함으로써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의 사회에 대한 관심은 비단 특수한 사회 공헌 활동에만 국한되어 표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이 비단 사회가 일반적으로 ‘사회 봉사 활동’이라고 부르는 활동으로 반드시 연결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리토시는 마땅히 그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타고난 성향에 따라 사회 봉사 활동 대신 교향곡을 작곡했던 모차르트나 해바라기를 그렸던 고흐 또한 자기 나름대로 사회에 봉사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기존 논의와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노리토시의 논의들을 살펴보자. 노리토시는 ‘최근 젊은이들은 해외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지적에 대해, “지금도 20대의 20% 정도는 여전히 출국하고 있으며, 여성의 출국률만 보면 네 명 중 한 사람의 비율로 해외를 다녀오고 있다. 달리 생각해 보면, 1990년대의 젊은이들이 지나칠 정도로 자주 해외를 드나들었던 것이다.”라며 그와 같은 편견을 부정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노리토시는 ‘해외여행’을 다룬 것이 아니라 ‘해외 출국’을 다루었다는 점에 주목하자. 사실 그의 관심사는 여행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자기 고향을 떠나지 않으려는 ‘현지화’다. 즉 일본식의 표현으로 ‘젊은이들이 현지화하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도시를 동경하지 않는다.’라는 통속적 견해에 대해 그는 다시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오늘날에는 지방 도시도 제법 발달해서 시골 중의 시골은 줄어들고 중소 도시가 증가했으며, 이러한 환경 변화야말로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도부현 내부에서 계속 살아가게끔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어쨌든 여전히 중앙(수도권)을 지향하는 젊은이와 더 이상 중앙을 지향하지 않고 태어나 자란 고향에서 계속 살고자 하는 젊은이로 양극화되어 가는 징후가 아닐까 싶다.”라고 결론했다. 결국 어정쩡한 결론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젊은이들이 자기가 하고 싶고 원하는 바대로 도시나 시골에 가서 사는 것일 따름이라고 간단하고 합리적으로 결론할 수 있다.

하지만 노리토시가 ‘현지화’에 대해 논했던 이유는 사실 그보다 더 크고 본질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각종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1970년대나 80년대, 90년대와 비교해 보더라도 생활 만족도가 높다.” “‘젊은이는 불행하다.’라고 걱정하는 어른들이, 오히려 젊은이보다 훨씬 더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충격적인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한다. 하지만 설문조사에 따르면 젊은이들은 “스스로 ‘행복하다.’라고 느끼면서, 동시에 ‘불안하다.’라는 생각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는 자기 연구의 주제인 ‘불행하면서도 행복한 젊은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교토 대학교 교수인 오사와 마사치의 다음과 같은 정리를 인용한다. “‘인간은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 ‘지금 불행하다.’고 말한다.” 바꿔 말하자면, 이제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뜰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태도를 ‘자포자기’, ‘절망적 안주’, ‘냉소적 안일’, ‘허무적 자족’ 가운데 뭐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다. 현대의 일본 젊은이들이 미래의 거창한 목적보다는 현재의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즐긴다는 노리토시의 통찰에는 연구자 또한 동의한다. 하지만 본 연구자가 보기에 미래에 대한 거창한 목적이 없다고 해서 미래를 냉소적으로 포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많은 젊은이들은 현재의 소소한 행복을 즐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안주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들은 돈이나 명예 등을 추구하는 속물적인 태도를 경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금의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돈이나 명예에 관계없이 진정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며, 오직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행복하기 때문이다. 만약 ‘미래에 대한 희망’이 이른바 ‘경제적 성장’이나 ‘신분 상승’ 등에 대한 희망이라면, 나 또한 한일 양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와 같은 희망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물론 나는 이것이 젊은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반복해서 지적해왔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일체의’ 희망을 버리고서 현재에 행복을 느낀다는, 말하자면 현재는 행복하고 미래는 불행할 것이 분명하니 현재를 실컷 즐기자는 ‘역사적 퇴행 주의’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단연코 노리토시의 견해에 반대한다. 사실 노리토시는 자신이 “옛날이 좋았지. 요즘은 엉망이야.”라는 노인들의 넋두리를 “요즘이 좋지. 미래는 엉망일 거야.”로 한 칸씩 미뤄놓은 데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눈치 채지 못하는 듯하다. 그와 같은 퇴행 주의적 태도가 바로 노리토시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기성세대의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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