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노리토시의 논의는 이를 넘어서서 좀 더 미묘한 지점까지 나아간다. 그는 “이것으로써 ‘생활만족도’라는 ‘작은’ 생각에 대해 질문했을 때보다 ‘사회’라는 ‘큰’ 생각에 대해 질문했을 때, 젊은이들의 만족도가 하락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사회’라고 하는 ‘커다란 세계’에는 불만을 느끼지만, 자신들의 머물고 있는 ‘작은 세계’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그에 따르면 ‘사회’의 미래는 현재보다 불행할 것이 분명하니 개인은 현재 행복을 누려야 한다. 사회와 개인을 분리하는 그의 이분법적 사고는 이와 같이 편리하지만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현재의 행복을 위해 ‘동료’ 들을 찾아서 ‘작은 세계’에 안주한다. “마치 한마을에 사는 주민들처럼 ‘동료’가 모인 ‘작은 세계’에서 일상을 보내는 젊은이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의 본질이다.” “따라서 젊은이들이 ‘지금 여기’에 있는 ‘작은 세계’ 속에서 살게 된다면, 바깥세상에 아무리 빈곤 문제가 부상하고, 또 세대 간의 격차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더라도, 이들 젊은이의 행복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젊은이들이 자신의 행복을 가늠하는 척도로서 자기와 같은 ‘작은 세계’에 속한 ‘동료’를 염두에 둔다면, ‘동료’ 이외의 세계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그것은 그들과 상관없는 문제인 것이다.”
이는 어쩌면 한일 양국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결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슬프게도, 노리토시의 이와 같은 결론이 노리토시 자신조차 설득시킬 수 없다는 점을 그에게 알려주고 싶다. 즉 그는 피스보트를 타고 세계를 일주하고 각국의 전쟁기념관을 방문해서 그에 대한 책을 쓰는 등, 그 어느 누구보다도 ‘큰 세계’ 속에 뛰어들고자 노력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비록 피스보트를 타지도 않고 각국의 전쟁기념관을 찾아다니지도 않으며 그보다 ‘작은 세계’에 안주하고 있지만, 그의 이와 같은 글로벌한 활동에 매우 찬사를 보낸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큰 세계’에서 활동한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자기 삶을 돌이켜보면 아마 그는 자기 자신이 결코 작은 세계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었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의 ‘작은 세계’ vs ‘큰 세계’ 이론은 이론의 설계자조차도 납득할 수 없는 실패작임이 분명하다. 하물며 그가 ‘작다’와 ‘크다’의 경계를 어떻게 엄격히 구획해낼지 나는 매우 궁금하다.
무엇보다 그는 ‘작은 세계’에 머무는 젊은이들이 결코 ‘그와 같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끈불끈하며’ 더 큰 세계로 뛰쳐나갈 기회만을 노린다는 점을 스스로 분명히 했다. “별다른 변화 없이 ‘동료’와 느긋하게 지내는 나날이 길어지면, 젊은이들은 분명 답답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품은 젊은이들이 모일 수 있는 간단명료한 ‘출구’가 있다면, 젊은이들은 기꺼이 그 문을 박차고 들어갈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처럼 직접 행동하는 젊은이들을 가리켜 ‘불끈하는 젊은이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는 ‘불끈불끈’하는 기분을 안고 있으면서도, 막상 현실에서는 늘 똑같은 친구들과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 즉 ‘끼리끼리 모여 무리를 만들어’ 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끼리끼리 지내는 생활’을 타개해 줄 ‘비일상’이 도래한다면, 그들은 ‘불끈’하여 그곳(비일상)으로 뛰어들 것이다.”
노리토시가 말한 바와 같이, ‘작은 세계’에 자신을 가둔 젊은이들은 결코 그와 같은 ‘현재’에 만족할 수도 없으며 행복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작은 세계와 큰 세계는 처음부터 따로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드넓은 세계를 마음껏 즐기고자 하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결코 자기 자신을 제한하려 드는 속 좁은 생각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불끈해서 더 넓은 세상으로 자발적으로 뛰어들며, 노리토시 자신은 불끈해서 피스보트를 타고 전 세계를 일주했다. 나는 그래서 노리토시는 열심히 잘 살았고 그의 삶 자체가 타당하며, 나아가서 그의 삶이 그의 이론을 부정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노리토시는 2장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다. 3장과 4장, 그리고 5장은 ‘불끈하는’ 젊은이들의 구체적인 사례를 좀 더 자세히 다룬 것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6장을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노리토시의 저작에 대한 분석을 마치도록 하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