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 어린이날 아침, 대학교 연구실은 텅 비어 조용하기만 합니다. 하여, 어린이날에 '어른이'는 무엇을 하는 게 가장 신날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린이날엔 역시 낮술이죠! 아, 제게 있어 이럴 경우의 낮술은 다른 분들이 커피 한 잔 하듯이, 저는 수제 맥주 한 잔 하는 것입니다. 취하는 법도 없고, 친구들과 대화하기에도 분위기가 아주 그만입니다. 맥주 한 잔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술이 약하지 않으신 분이라면 적극 추천해 드립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연락을 해도 답하는 이가 없습니다... 결국 백주 대낮에 홀로 마실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이 좋은 날씨에 술 한 잔 할 생각을 하니 기쁜 마음 한 가득입니다. 이에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143번 버스 -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이제훈과 수지가 타고 다녀서 이제는 건축학개론 버스라 불리기도 하지요 - 를 타고 경리단길로 이동합니다. 따듯한 봄날, 더도 말고 <더 부스(The Booth)>에서 딱 한 잔만 마시고 올 계획입니다.
143번 버스를 타고 해방촌 정류장 바로 전인 한신 아파트 정류장에서 내리면, 맞은편에 경리단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뿔싸, <더 부스>는 12시 반에 영업을 시작하는데, 저는 30분이나 일찍 와버렸네요. 내친김에 이태원 역까지 산보나 다녀오렵니다. 아기자기한 레스토랑들과 BMW 매장을 지나, 이태원으로 넘어가는 언덕배기를 낑낑거리며 오릅니다.
호주 출신 드러머 토니가 직접 운영하는 <Tony's Aussie Bar&Bistro>를 지나서
1인 주방 시스템이라 음식이 다소 늦게 나오지만 편안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겸손한 술집>을 넘어 내려갔더니,
엥? 맞은편에 평소 못 보던 <스타벅스>가 있었습니다. 예전부터 있었는데 제가 미처 보지 못했나 봅니다. 다음 기회에 방문키로 하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 <더 부스>에 들어섭니다.
저는 이와 같은 분위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누가 보아도 대낮부터 술에 만취해 행패 부릴 무드는 아니지요? 저는 사진에 보이는 문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서, 제가 이 가게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동강 페일 에일'을 주문합니다.
'대동강 페일 에일'은 홉의 진한 향과 열대과일의 화려한 맛이 잘 어우러져, 처음 입에 대는 순간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줍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일향이 엷어지고 쓴 맛이 강해집니다만, 그것은 그것대로 또 다른 여행 같아서 제법 맛이 있습니다. 비록 4.6%의 낮은 도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술인지라, 어느 정도 술잔을 비우니 살짝 몸이 더워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에 혼자 술을 마실 때면 항상 떠오르는 이백의 시 월하독작[ 月下獨酌 ] 제1수를 검색해 봅니다. 그것을 외울 정도로 머리가 좋지는 않으니까요.

월하독작[ 月下獨酌 ] 제1수 - 이백(李白)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舉杯邀明月(거배요명월)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月既不解飮(월기불해음)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꽃 사이 놓인 술 한 동이
아는 이 없이 홀로 마시네
잔 들어 밝은 달, 한 잔 하자 부르니
달빛 비친 내 그림자, 셋째 술친구 되네.
허나 달이란 놈은 술을 마실 줄도 모르고
그림자란 놈도 나를 졸졸 따라다닐 뿐...
흔히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성당(盛唐)의 시인 이백(李白, 701-762)은 달과 술을 좋아했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한국에도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지요.
이백은 <월하독작>이란 제목으로 총 4수의 시를 지었는데, 상기한 시는 제1수의 일부입니다. 이 짧은 시에도 서로 다른 여러 해석들이 있는데, 저는 그냥 제 편한 대로 읽었습니다. 저는 한시(漢詩) 전공자도 아니고, 월하독작을 해석하느라 책상머리에서 골을 썩히기 보다는 직접 월하독작을 하는 스타일이니까요. 게다가 월하독작도 모자라서, 이제 일하독작(日下獨酌)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월하독작>은 사뭇 쓸쓸한 분위기를 내는 듯도 합니다만, 저의 <일하독작>은 매우 신납니다. 사실 저 또한 '꽃보다 아름다운 낯선 이들' 가운데 술 한 잔 놓고 아는 이 없이 홀로 마시지만, 그래도 흥겨운 팝 음악을 배경으로 해서 행인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거든요. 이백 또한 독작(獨酌)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3인이 술자리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래서 독작(獨酌)이란 표현이 더욱 역설적으로 다가오는 것이겠지요.
제가 시의 전문(全文)을 인용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는 이백이 그 시에서 외로움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혼자 술 마시다 흥에 겨워 달, 그리고 달빛에 비친 제 그림자를 벗 삼아 한바탕 춤추고 놀 정도면 외롭다 말하기 어렵지요. 오히려 온 우주를 벗 삼은 대인(大人)이라 보아도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이백은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 아득한 운하에서 다시 만나리)'라고 시를 끝맺으니까요.
저의 경우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태양을 비좁은 술자리에 초대하지도 않았고, 멀쩡히 있는 제 그림자를 술친구로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저는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유럽여행>을 펼쳐 들었습니다. 20세기 여행작가로 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쟌 모리스 두 사람을 제일 좋아합니다. '열린책들'에서 카잔차키스 전집을 내놓은 것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리스 기행> <스페인 기행> <영국 기행> 등 멋진 글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쟌 모리스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해외에서는 꽤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여행작가입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맹한 군인이자 다섯 아이들의 아버지이면서도, 46살에 성전환 수술을 해서 지금은 아내와 사이좋은 자매처럼 늙어가고 계신 1926년생의 '그녀'입니다.
요즘은 저작권 문제 때문에 좋아하는 글귀도 인용하기가 꺼려지네요. 이러다가 덥석 인용하고선 후회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렵니다. 혹여 이 분의 여행 에세이를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여행과 철학이 버무려진 책에 목말라하시던 독자분들 이리면, 분명 이 책을 반기실 것입니다. 좋은 글을 쓸 재주는 부족하지만 좋은 글을 읽는 것만큼은 정말로 좋아하는 제게 삶의 자양분이 되었던 책입니다. 참고로 저는 이 책을 낸 출판사 알바가 아닙니다.
이제 술도 다 마셨고 일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배낭여행 기분을 내며 옆자리 외국인에게 말을 걸진 않았지만, 제 주변에서 각자 낮술을 즐기시던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제 발 밑에 서린 그림자와 싱거운 대담을 나누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사람 사는 떠들썩한 분위기를 내주셨으니까요.
제 집 근처까지 가는 143번 버스를 기다리는 제 그림자가 이백의 그것처럼 건들건들 춤을 춥니다. 아마 월하독작을 끝내고 귀가하는 이백의 발걸음도 갈 지자에 가까웠겠지요. 맥주 한 잔에 취할 정도로 술이 약하지는 않은데, 역시 더위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했나 봅니다. 이렇게 어린이날에 어른이는 텅 빈 도로를 달리는 버스 창가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며 기분 좋은 단꿈의 여행을 떠납니다. 태양과 제 그림자는 잠든 제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지키고 섰습니다. 이만하면 꽤나 '운수 좋은 날'입니다.
- 맹꽁이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