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 가득한 송끄란 축제의 낮과 밤

송끄란(Songkran)은 Sankrandhi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비롯된 말로, ‘변화’나 ‘이동’을 뜻한다. 하지만 무한히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에서도 변치 않는 무엇은 항상 있는 법이다. 아니, 변치 않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만 비로소 서로 다른 인간들이 조화로이 사는 세상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변치 않는 무엇은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지니며 동등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렇게 되어야만, 그것은 만인이 동등하게 인정하고 따르는 보편타당한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는 그 변치 않는 무엇이 인간의 본성으로 내재한다고 보고 이를 불성(佛性)이라 일렀는데, <법화경(法華經)>의 “모든 중생은 불성을 소유한다(一切衆生 悉有佛性)”는 구절이 그 핵심을 잘 요약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만인이 부처’라는 불교의 핵심 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왁자지껄하게 돌아가는 송끄란 페스티벌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까닭이 축제를 즐기러 온 타국인마저 부처로 대하는 태국인들의 변치 않는 자비심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2016년 4월 15일 금요일 이른 아침, 나는 카오산 로드(Khaosan Road) 근방의 노천카페에 들어가 큼지막한 차양막이 만들어준 넉넉한 그늘 아래 자리 잡고서, 일찍부터 이동하는 배낭여행자들의 추레한 카키색 반바지와 만국기를 꿰매 놓은 묵직한 배낭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더 많은 세상을 즐기고 싶다는 변치 않는 본성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는 세상을 향해 호기심 어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밤새워 물세례를 즐겼던 만국의 동자승들은 이제 축제가 끝나버린 카오산 로드를 떠나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 나서는 중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나 또한 도심 물놀이가 진행 중인 싸얌 센터(Siam Center) 쪽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카오산 로드에서 잡아탄 47번 버스에서 내려 싸얌 센터 뒤편에 마련된 물 축제 구역의 검색대를 통과하니, 이미 물 축제가 한창인 별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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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과 주황색, 파란색과 빨간색 등 온갖 빛깔을 띤 물총들이 어지러이 섞이며 사람들을 적셔댄다. 외국인인 나는 그들에게 좋은 표적이다. 하지만 태국인들은 얼굴에 대고 물총을 쏘기보다는 주로 몸통을 겨냥하기 때문에,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 사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이들은 내게 일종의 관정(灌頂) 의식을 베풀고 있는 셈이다. 만인이 부처라는 기본 인식 아래 여유로이 베풀어지는 이들의 변치 않는 자비심은 자칫 변화무쌍한 혼란에 빠질 수 있는 물 축제의 분위기를 평화롭게 이끌어가고 있었다. 나 또한 동자승이 되어 이들과 함께 얼굴에 흰 반죽을 잔뜩 묻힌 채, 액운을 씻어주고 평화를 빌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놀던 나는 야외 클럽에서 밤을 새워 물 축제를 벌이겠다는 저녁 일정을 상기해 내고서, 물 축제 구역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지나가는 픽업트럭에서 쏟아지는 얼음물 세례, 택시와 버스로부터도 난데없이 날아드는 차가운 물줄기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흠뻑 젖어 호텔로 돌아온 뒤, 샤워를 끝내고 다시 클럽으로 향했다.




RCA(Royal City Revenue)는 「루트 66(Route 66)」, 「오닉스(Onyx)」 등 대형 클럽들이 소재한 방콕 최대의 클럽 구역이다. 나는 「루트 66(Route 66)」이 오후 5시에 개장한다는 말을 듣고서 6시가 넘어서야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겠거니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지갑과 휴대폰이 든 푸른색 방수팩을 목에 걸고 조잡한 연두색 물안경을 쓴 우스꽝스러운 복장의 내가 물총을 건들거리며 7시에 입장했을 때, 클럽 안은 이미 인산인해라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신중히 고른 물총은 쓸 기회가 드물었는데, 왜냐하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총을 꺼내들 공간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맨몸으로 들어가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추며 놀다, 옆 사람이 뿌리는 물을 뒤집어쓰면 그만이다.


13040836_1558885564408719_8004751565890595476_o.jpg ⓒ 2016 차은숙


젊은이들만 가득할 것 같던 클럽에는 실상 태국의 남녀노소가 죄다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머무는 클럽에 나이 많은 사람이 있다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내가 옆에 있던 태국 청년에게 그와 같은 분위기가 가능한 까닭을 묻자, 그는 “클럽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에 따라 춤추고 노는 곳이지, 외모나 나이에 따라 사람을 차별해서 들이는 공간이 아니다”고 대답했다. ‘수질 관리’가 엄격하고 연령 제한 및 외모 제한을 당연시하는 대다수 한국 클럽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와 같은 대답은 다소 낯설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만인이 부처’라는 평등의식을 공유한 이곳 태국인들에게는 나이나 외모에 따라 클럽 입장에 제한을 둔다는 차별의식이 오히려 불가사의할지도 모른다.


13041475_1558885304408745_2131645814584466946_o.jpg ⓒ 2016 차은숙

익숙한 EDM(Electronic dance music)이 클럽을 가득 채우는 것도 신나는 일이었지만, 나는 태국 라이브 밴드들이 나와 연주하고 젊은이들이 거기에 환호하는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았다. 어찌 보면 한국의 뽕짝에 가까운 리듬의 곡들에 젊은이들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럽다. 이 곳에서는 ‘간지 나게’ 춤출 필요도, 그럴 여유 공간도 없다. 오직 흥겨운 리듬에 맞춰 신명 나게 팔다리를 놀리면 그만이다.


KakaoTalk_20160508_224044845.jpg ⓒ 2016 차은숙


얼음물을 너무도 맞아 체온이 떨어져 이제는 귀가해야겠다고 여기고 시계를 들여다보니 이미 12시가 넘었다. 5시간을 넘도록 스탠딩으로 놀았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나이에 이리도 정신없이 즐긴 나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아마 내일이면 온 몸이 쑤시겠지만, 그것 또한 기분 좋은 아픔일 것이다.


13063090_1558885784408697_8911349217511867461_o.jpg ⓒ 2016 차은숙


‘EXIT 1’이라 적힌 형광 불빛 아래 줄을 지어 빠져나오자, 온갖 주전부리를 파는 크고 작은 좌판들이 실내 곳곳에 벌려 있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주차장에는 오토바이들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주차되어 있었다. 건물 로비나 쉼터에는 놀다 지쳐 쓰러져 쉬는 물에 젖은 중생들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만인에 대한 자비심이 살아 숨 쉬는 불교 사회이기에, 이와 같이 어디서든 편히 쉴 수 있는 것이리라. 부처가 가르친 평화는 타국인들이 대다수인 카오산 로드나 도심 한 가운데 위치한 싸얌 센터뿐만 아니라, 야밤의 클럽에도 그렇게 자비로이 내려앉아 만인을 지켜주고 있었다.


13041390_1558886717741937_6255401790938584940_o.jpg ⓒ 2016 차은숙


흠뻑 젖은 클럽 진입로를 되돌아 숙소로 향하는 길 위에는 여전히 물놀이가 신명 나게 펼쳐지고 있었다. 힌두교에는 ‘신의 놀이’를 뜻하는 ‘릴라(lila)'라는 개념이 있다. 하지만 온 존재계가 신의 놀이로 가득하다는 뜻의 릴라는 힌두교의 전유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전 세계인들이 동자승으로 돌아가 하나 되어 노는 이 곳이 바로 불국토이며 릴라임을 나는 태국의 송끄란 페스티벌을 통해 확인했다. 내 안의 동자승이 삶에 지칠 때쯤, 나는 어쩌면 내년 이맘때에도 이 곳에 있을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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