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구야 공주, 겨울왕국 그리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

브로드웨이-케이팝-보컬로이드 음악으로 이어지는 뮤지컬 애니 변천사

안녕하세요, 여러분! 알이즈웰입니다.

2020년대는 바야흐로 OTT 약진의 시대라고 할 수 있죠.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칩거 생활을 해야만 했던 많은 세계인들에게, OTT는 콘텐츠가 끊이지 않는 화수분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단연코 두드러졌던 OTT 플랫폼은 넷플릭스였습니다. 넷플릭스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문화 생태계 자체를 바꿀 정도로 파급력이 컸으니까요. 이런 넷플릭스의 성공 요인에 대해 많은 분석들이 오갑니다. 물론 단일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가 아니죠. 하지만 여러 요인들 가운데 '한국과 일본 콘텐츠의 성장 가능성을 일찌감치 점찍고 투자를 아끼지 않는 선택'이 주요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한국 드라마인 <오징어 게임> 등이 넷플릭스를 통해 케이컬처를 유행시켰으며, 2025년에는 케이컬처를 주제로 한 미국 애니메이션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넷플릭스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죠. 한편 넷플릭스는 2025년 LA에서 열린 애니 엑스포에서, 전 세계 넷플릭스 사용자의 50%가 일본 애니메이션(anime)을 시청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어느덧 일본 애니메이션은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왔으며, 서브 컬처를 가장한 메인 컬처로 맹위를 떨치는 중입니다.

https://www.cineplay.co.kr/ko-kr/articles/19531


이런 가운데, 2025년 말에 넷플릭스는 전 세계 오타쿠들의 심정지를 유도하려는 사악한(?) 의도 아래, 1분이 조금 안 되는 영상 하나를 공개했습니다. <초(超) 가구야 공주!>라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의 예고편이었죠.

https://www.youtube.com/watch?v=g_stGHNz1mQ

[초(超) 가구야 공주! | 특별 예고편 | 넷플릭스]

위의 예고편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래 가장 화려한 일본풍 미감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전통과 미래의 완벽한 조화, 얼마나 작화팀을 갈아 넣었을까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퀄리티를 자랑했죠.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츠네 미쿠를 닮은 흰머리 소녀가 등장해 "世界で一番おひめさま(세카이데 이치방 오히메사마, 나는야 세계제일의 공주님)"라는 첫 소절을 부르자마자, 전 세계 보컬로이드 덕후들은 울부짖으며 이불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하츠네 미쿠다! 미쿠의 <월드 이즈 마인(World is mine)>이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지만 눈물로 흐릿해진 두 눈을 깜빡이며 모니터를 응시한 덕후들은 더욱 믿을 수 없는 내용을 접했습니다. 료(Ryo, 슈퍼셀), 아쿠에라(Aqu3ra), 허니웍스(HoneyWorks), 유이고(yuigot), kz, 40mP까지 고전 보컬로이드의 전설적인 프로듀서들이 <초(超) 가구야 공주!>의 음악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합성 음악 엔진' 분야에서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모두 힘을 합해 영화 음악을 제작하는 것과 같죠. 저 명단을 한 편의 영화에서 모두 접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보컬로이드 덕후들은 수전증을 주체하지 못해 손을 덜덜 떨었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혁명이다. 스토리가 다소 아쉬울지라도 상관없다. 저 정도의 끝판왕 작화와 이 정도 퀄리티의 음악이면, 역사에 길이 남을 혁명적 작품이다! 일단 공개되기만 하면, 마구마구 봐 줄테다!"


자, 여기까지 읽으신 독자 분들의 반응은 대부분 이 한 마디로 정리됩니다. "어쩌라고, 씹덕아!" 맞습니다, 그런 반응은 매우 정상입니다.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 월드 이즈 마인, 그래서 어쩌라고? 아무도 모르는 분야에서 뭔 일 났다고 해서 주접떨지 말라고, 씹덕아!" 이런 반응 또한 정상입니다. 게다가 저는 보컬로이드 덕후가 아니기 때문에, 이불 밖으로 뛰쳐나가거나 손을 떨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2020년대 한일 문화 교류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은 학자로서, 이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혁명적인가는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넷플릭스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후발 주자가 아니라, 세계의 트렌드를 손수 만들어내는 선발 주자입니다. 물론 잠재 수요를 파악하지 못할 경우, 감히 '트렌드 세터'를 자처할 수도 없죠. 다만 넷플릭스는 서브 컬처에 해당하는 보컬로이드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확신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보컬로이드 뮤지컬 애니메이션'인 <초(超) 가구야 공주!> 제작에 과감히 투자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야기해도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왜냐하면 이 글을 접하시는 많은 분들께, 보컬로이드니 하츠네 미쿠니 하는 단어들은 외계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설명을 간략하게 덧붙이고자 합니다. 이는 2020년대 제이팝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도 결정적이기 때문에, 분명히 흥미로우실 것입니다. 저 또한 공부하는 차원에서 정리하는 것이니, 이 분야에 남다른 깊이를 지니신 분들께서는 너그러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980년대에 유행하던 주현미의 트롯이나 변진섭의 발라드는 '한국 가요'이지만, 오늘날 말하는 '케이팝'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케이팝은 '다수의 멤버들이 역할을 나누어 담당한다(노래 담당, 춤 담당, 랩 담당 등), 다양한 장르를 한 곡에 섞는다, 칼군무를 보여준다' 등의 특징이 있기 때문이죠. BTS나 블랙핑크가 활동하는 장르를 태진아나 이문세의 음악과 비교해서는 안 되겠죠. 1996년 데뷔한 H.O.T.가 오늘날 케이팝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전후의 음악 시장 동향을 살펴보는 편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2020년대 제이팝을 이해하려면 어느 시기부터 살펴보아야 할까요? 그것보다 '제이팝'이란 무엇일까요? 일본은 미국과 함께 가장 다양한 장르가 함께 발전하는 음악 시장으로 유명합니다. 따라서 특정 장르만을 '제이팝'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2026년 현재 '케이팝'은 '댄스 음악'으로 한정되지만, 제이팝은 그보다 훨씬 범위가 넓거든요. 다만 2020년대 한국인들이 '제이팝' 하면 무엇을 떠올리는가에 주목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2023년에 한국의 걸밴드 QWER이 <디스코드>와 <수수께끼 다이어리>로 데뷔했을 때, 많은 이들은 "QWER은 제이팝 스타일의 음악을 한다. 띵똥띵똥 거리면서 속도가 엄청 빠른 것이 일본 애니메이션 OST 풍이다."라고 평가했었죠. 그렇습니다. 제이팝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대중에게 제이팝이란 '띵똥띵똥 거리면서 속도가 빠른 일본 애니메이션 OST 스타일 음악'을 지칭합니다. 왜냐하면 대중은 넷플릭스 일본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제이팝을 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띵똥띵똥 거리면서 속도가 빠른 음악'의 원조가 바로 보컬로이드 음악입니다. 이 때문에, 2020년대 제이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컬로이드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보컬로이드(VOCALOID)는 일본 야마하에서 개발한 '음성 합성 엔진'입니다. '음성 합성 엔진'은 쉽게 말해서 사람 목소리가 아닌 '기계음'을 보컬로 사용하는 프로그램이죠. 프로그램에 가사와 멜로디를 입력하면, 기계음을 보컬로 삼은 노래가 완성되죠. 2000년대 중반, 현실에서 마음에 드는 보컬을 구하는데 시간과 비용을 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던 아티스트들이 일본에 많았습니다. 그 천재들은 방구석에서 보컬로이드 프로그램을 통해 곡을 만든 뒤, '니코니코 동화(니코동)'라는 일본 동영상 사이트에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보컬로이드 프로듀서 가운데 오늘날에도 유명한 3명의 '요'가 있습니다. 바로 '요네즈 켄시', '요아소비(아야세)', 그리고 '요루시카(나부나)'입니다. 제이팝 애청자라면, 이 3명 가운데 적어도 한 팀의 이름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체인소맨> OST를 담당한 요네즈 켄시, <최애의 아이>의 주제곡인 <아이돌>을 부른 요아소비, 그리고 일본 최고의 음유시인인 요루시카는 2020년대 제이팝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자, 원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보컬로이드 음악이 점차 관심을 끄는 가운데, 보컬로이드를 완벽하게 '의인화'하는 데 성공한 캐릭터가 있었으니, 바로 '하츠네 미쿠'입니다. 2007년 8월 31일에 개발된 하츠네 미쿠는 보컬로이드 음악을 완벽하게 의인화한 캐릭터였으며, 일본 서브컬처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보컬로이드 프로듀서라면 누구나 그녀의 이미지를 빌려서 자신의 곡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츠네 미쿠의 제작사인 크립톤퓨처미디어가 '비영리인 경우에 한해' 하츠네 미쿠 이미지 사용을 무료로 허용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츠네 미쿠를 가수로 삼아서 자신의 음악을 홍보하려는 뛰어난 뮤지션들이 앞다투어 미쿠 곡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지의 장난꾸러기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창조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시대였죠.

그리고 누구나 하츠네 미쿠 곡을 만들 수 있었기에, 역으로 하츠네 미쿠는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장르를 소화하는 최고의 인기 뮤지션이 되었습니다. 2007년에 데뷔했는데 2025년에 한국에서 2차례 대형 콘서트를 완판시켰죠.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사에구사 시게아키 도쿄 음대 교수는 하츠네 미쿠가 도쿄 올림픽 공식 주제가를 불러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모릅니다.

하츠네 미쿠를 내세워 만든 수많은 보컬로이드 명곡 가운데 대표곡은 료(Ryo) 프로듀서의 <멜트(Melt)>와 <월드 이즈 마인(World is mine)>입니다. 후자의 경우, 뭔가 낯이 익지요? 그렇습니다. <초(超) 가구야 공주!> 예고편에서 덕후들을 기절시켰던 바로 그 곡입니다. 이 곡의 원작자인 료(Ryo)가 직접 영화에 참여해서 이 명곡을 리믹스했죠.

게다가 <초(超) 가구야 공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하츠네 미쿠의 곡이 무려 2개나 더 나왔습니다. 우선 하츠네 미쿠가 일본의 전설적인 밴드인 '범프 오브 치킨'과 콜라보한 <Ray>는 kz가 만든 곡이었습니다. 그가 이번 OST에 참여했으니, 당연히 원작자로서 편곡에 힘썼겠죠? 다음 곡은 서브 컬처 세계에 하츠네 미쿠 돌풍을 일으켰던 <멜트>였습니다. 이 곡의 원작자는 앞서 말한 료(Ryo)입니다. <월드 이즈 마인>과 마찬가지로 원작자가 직접 편곡함으로써, '원곡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중요시하는 덕후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QWER 기타리스트 히나의 '하츠네 미쿠' 코스프레]

한편 보컬로이드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지는 곡들은 인간이 부르기 어려운 음역대와 빠른 리듬을 특징으로 삼았습니다. 기계음을 보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새로운 스타일이었죠. 하지만 괴짜가 차고 넘치는 서브 컬처에서, 보컬로이드 곡을 사람이 직접 불러서 업로드하는 경우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보컬로이드 곡을 직접 불러 자신의 가창력과 음악성을 뽐냈던 뮤지션들을 당시에 '우타이테'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일본에서 활동하는 주요 가수들 가운데 우타이테 출신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도(Ado)와 이브(Eve), 레오르(Reol), 야마(yama) 등입니다.

보컬로이드 프로그램을 통해 작사와 작곡을 하는 뮤지션 그리고 그런 곡들을 직접 불러 유명해진 가수들이 점차 제이팝 신을 장악함에 따라, 그들의 보컬로이드 뮤직 스타일 또한 일본 음악계의 주류로 떠올랐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보컬로이드 음악 스타일이 애니메이션에 기가 막히게 어울렸죠. 결과적으로 '보컬로이드 음악'은 2020년대에 세계인이 '제이팝'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뮤직 스타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음지'로 인식되던 이 음악 장르를 '양지'로 올려 보낼 기회를 엿보는 덕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보컬로이드 음악 덕후로서 <초(超) 가구야 공주!> 감독을 맡게 된 '야마시타 신고(山下清悟)'가 그중 한 명이었죠. 아니나 다를까, 그는 넷플릭스 자본을 이용해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모조리 실현해내고 말았습니다.

[<초가구야 공주> 감독과 주인공 인형]

저는 삶에 치여 <초(超) 가구야 공주!>가 1월 22일에 공개된 것도 모르고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일요일인 1월 25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넷플릭스에 접속해 이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었죠. 개인적인 감상평은 영상미 100점, 캐릭터 디자인 100점, 음악 90점, 스토리 80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뛰어넘는 혁명성은 100점 만점에 1000점을 주고 싶네요. 사실 앞의 점수도 다소 짜게 준 것입니다. 제가 볼 때에는 좋았는데 다른 사람들의 평을 읽어본 뒤에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생각해서 점수를 깎았거든요.

첫째, 이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토리가 지나치게 복잡했던 것이 아쉬웠습니다. 어떤 작품이 대중적으로 히트하기 위해서는 초등학생이 봐도 한눈에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스토리 전개가 쉽고 개연성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야마시타 신고 감독은 앞으로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창작자가 가장 저지르기 쉬운 실수-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다 때려 넣는 무리수-를 저질러 버렸습니다. 그래서 원래도 알쏭달쏭한 '타임 패러독스' 줄거리가 한층 더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넷플릭스 오리지널이기 때문에 지니는 장점이 있습니다. 즉 방구석에서 여러 번 다시 봐도 추가 비용이 들지 않죠. 일본 덕후 특유의 감성으로 복선을 많이 깔아놓았기에, 여러 번 보면 볼수록 가슴에 와닿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써놓고 보니, 80점이 좀 짜긴 짜네요.

둘째, 음악의 경우 제 입장에서는 100점이었습니다. 다만 애니메이션 속에서 라이브 공연 형태로 연주되다 보니, 음악 자체를 집중해서 듣고자 했던 보컬로이드 덕후들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캐릭터들이 노래를 부르다가 웃기도 하고 게다리 춤을 추는 등 다소 집중하기 어려웠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보컬로이드 덕후가 아니라 뮤지컬 애니메이션 덕후라서, 이런 점들이 마이너스이기는커녕 오히려 플러스였습니다. 제게는 음악보다 캐릭터가 더 중요했거든요.

사실 <초(超) 가구야 공주!>는 예고편을 통해 덕후들에게 잘못된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월드 이즈 마인>을 내세움으로써, 이 영화의 주인공은 보컬로이드 음악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죠. 하지만 공개된 결과물을 보니, 이 영화에서 음악은 스토리를 돕는 보조 역할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보컬로이드 덕후들은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마치 영화 <대홍수>가 실제로는 대홍수와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재난영화도 아니라는 것에 충격을 받은 영화팬 입장과도 같았죠.

이런 점들을 고려해서 10점을 깎았지만, <초(超) 가구야 공주!>의 음악은 최고의 뮤지션들이 합심하여 만들어낸 최상급의 성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보컬로이드 덕후가 영화감독을 맡아서 최고의 작곡가들을 불러 모아 보컬로이드 뮤지컬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죠.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감사히 절하고 받아먹어야죠.

아, 저도 불만이 있기는 합니다. <멜트>를 영화 중간이 아닌 엔딩 크레딧에 삽입했다는 점이죠. 보컬로이드 덕후들의 애국가인 <멜트>를 주인공들의 공연 레퍼토리에 집어넣었더라면, 관람평이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엔딩 크레딧을 skip합니다. 그래서인지 <멜트>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덕후들이 많더군요. 마케팅 측면에서 볼 때, 이건 분명히 큰 실책입니다.


[브로드웨이 vs 케이팝 vs 보컬로이드]

자, 하지만 제가 <초(超) 가구야 공주!>를 보고서 놀란 것은 그 '혁명성'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지금까지 먼 길을 걸어왔네요. 앞선 설명에 덧붙일 따름이니, 그다지 긴 내용은 아닙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2025년 중반에 공개되자마자, 저는 그 혁명성에 크게 놀랐습니다. 심지어 그 당시는 사람들이 <케데헌>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고 있을 때였지요. 넷플릭스에서는 대대적으로 홍보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넷플릭스의 자본력으로 시도해 보는 여러 도전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겨졌죠. 하지만 뮤지컬 애니메이션 덕후의 입장에서, <케데헌>은 애니메이션 역사상 하나의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관련 글을 브런치스토리에 여러 썼습니다.

https://brunch.co.kr/@joogangl/715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기존의 디즈니 뮤지컬 애니메이션과 여러 차별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바로 '브로드웨이'에서 '케이팝'으로 음악 스타일을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1988년에 나온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대성공 이후, 디즈니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뮤지컬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풍은 수십 년 동안 큰 변화 없이 '브로드웨이 스타일'을 고수했죠.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푼젤>, <뮬란>에서 최근의 <겨울왕국>에 이르기까지, 그 공식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마치 뉴욕에서 <미스 사이공>이나 <레 미제라블>을 보는 것 같았죠.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나 주인공은 계속 바뀌었지만, 음악 스타일에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굳이 바꾸지 않아도 항상 성공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디즈니의 아성에 맞선 언더독 소니 픽처스의 경우, 2025년 작품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기존의 판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격렬한 고난도의 안무 및 빠른 비트 전개, 그리고 그에 걸맞은 케이팝 뮤직 비디오 스타일을 전면에 도입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기존의 디즈니 뮤지컬 애니메이션과 차원이 다른 속도감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1.5배속 버튼을 누른 것과 같은데, Z세대와 알파 세대의 감성에는 확실히 이런 속도과 화면 전환이 찰떡이었죠.

결과적으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뮤지컬 애니메이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절대 시공간이 당연시되던 세상에 아인슈타인이 상대 시공간 개념을 제시한 것이나 다름없었죠. 뮤지컬 애니메이션 하면 '브로드웨이' 스타일 이외 다른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기에, '케이팝'으로 승부를 보았죠. 결과는 초대박 이었습니다. 이제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때 '브로드웨이' 스타일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팝'으로도 충분히 가능했죠. 그렇다면 '케이팝' 이외에 다른 음악 장르를 도입하는 것은 어떨까요?


이런 시도는 뜻밖에 빨리 찾아왔습니다. 일본 제작사인 '트윈 엔진'이 야마시타 신고와 일본 보컬로이드 음악계 전설의 프로듀서들을 모아, '보컬로이드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시도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버금가는 대단한 혁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첫째, 디즈니의 '브로드웨이 스타일' 그리고 소니 픽처스의 '케이팝 스타일'은 모두 '메이저' 스타일입니다. 202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주류 음악'이죠. 브로드웨이 스타일은 전통적으로도 널리 인정받았으며, 케이팝은 한 때 마이너였으나 BTS와 블랙핑크가 맹활약 중인 2020년대에는 완전히 주류 음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반면에 '보컬로이드 음악'은 일본에서조차도 아직까지는 '양지'가 아닌 '음지'로 분류됩니다. 여기에서 '음지'란 뭔가 음침하거나 불량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매니악한' 느낌이 강해서 불특정 다수에게 수용되기에는 진입장벽이 높다는 뜻이겠지요. 보컬로이드 음악 덕후들조차도 자신을 '양지'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넷플릭스라는 1등 플랫폼을 빌려 '보컬로이드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시도입니다. 블랙핑크를 탄생시킨 YG 출신 프로듀서 '테디'가 <케이팝 데몬 헌터스> 음악을 담당한 것과는 천지 차이죠. <케데헌>을 만들 때보다 훨씬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습니다.

둘째, <초(超) 가구야 공주!>에서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인 가구야, 이로하, 야치요의 무대는 그야말로 '버추얼 아이돌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무대는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구도입니다. 물론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이 섞여 있기는 합니다만, 뉴욕 브로드웨이나 블랙핑크 콘서트에서 익히 접할 수 있는 무대 매너를 보여주죠. 그런 '친숙함'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이 편하게 즐길 수 있었고요.

반면에 <초(超) 가구야 공주!>에서 3명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버추얼 무대'는 '아, IT 기술이 좀 더 발달하면 언젠가 저와 같은 가상 무대를 보겠구나. 아니, 내가 버추얼 세계인 '츠쿠요미'에 접속해서 저와 같은 세상 속에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이 애니메이션은 가상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그래픽이 과거의 그 어떤 뮤지컬 애니메이션보다 화려합니다.

사실 2026년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의 작화력은 평범한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아바타 시리즈의 그래픽이 뛰어나다지만, 어차피 CG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귀멸의 칼날: 무한성 편>과 <체인소맨: 레제 편>에서 수 천억을 들인 영화들보다 뛰어난 영상미와 상상력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초(超) 가구야 공주!> 또한 이에 못지않습니다. <초(超) 가구야 공주!>의 게임 스타일 화면 전환(실제로 전투 신이 많습니다)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보다도 훨씬 빠르고 다채롭습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디즈니와 소니 픽처스가 현재를 그렸다면, 일본의 <초(超) 가구야 공주!>는 미래를 보여줍니다.

셋째, <초(超) 가구야 공주!>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구야 공주> 설화를 바탕으로 해서, 일본의 전통을 배경으로 한 가상 세계를 창출해 냅니다. 이는 일본 전통의 목욕탕과 귀신 문화를 화려하게 그려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 최고의 성취입니다. 물론 <케이팝 데몬 헌터스> 또한 한국의 무녀 전통 및 저승사자 콘셉트, 그리고 현대의 여러 케이컬처를 영화의 소재로 사용해서 큰 인기를 끌었죠. 하지만 <초(超) 가구야 공주!>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일본 문화들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못지않게 다양합니다. 쉽게 말해, 일본의 과거와 현대 문화에서 끌어다 쓸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끌어다 썼습니다.

<초(超) 가구야 공주!>에는 닌텐도나 플레이스테이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본 게임 스타일의 배틀 신이 등장합니다. 향후 <초(超) 가구야 공주!>가 게임으로 출시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아니, 이 애니메이션의 모든 서사 구조나 전개 방식이 게임 내러티브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뮤지컬 스타일인 디즈니나 소니 픽처스 영화와는 차별화되죠. 현대 일본 문화를 충실히 반영한 덕택입니다.

또한 <초(超) 가구야 공주!>는 일본을 비롯한 세계에서 대유행 중인 버추얼 스트리밍을 큰 주제로 넣었습니다. 주인공인 이로하는 버추얼 스트리머이기도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때 유행했던 메타버스 또한 극 중 가상 세계 '츠쿠요미'를 설계하는데 참고가 되었습니다. '버추얼 아이돌' 및 메타버스를 뮤지컬 애니메이션의 전면에 세운 것은 놀라운 혁신입니다. 버추얼 아이돌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일본이기에 가능한 시도였죠.

한편 디즈니나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의 단선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스토리 대신, 복잡한 '타임 패러독스'를 스토리 구조로 선택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라노벨을 즐겨 보는 이라면 익숙한 서사 형태죠. 하지만 '뮤지컬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은 분명히 아닙니다. 디즈니의 <겨울왕국>이나 소니 픽처스의 <케이팝 데몬 허헌터스>는 모두 성장형 서사를 채용했죠. 하지만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이제 '성장' 보다는 '있는 자리에서 함께'를 중시합니다. 이 또한 다분히 2020년대 일본 문화의 반영이죠.

이 외에 주인공 3명이 삼인조 뮤지션이 되어 공연하는 광경은 일본의 퍼퓸(Perfume)이나 요아소비의 무대를 연상케 합니다. 그녀들은 <케데헌>의 헌트릭스와 마찬가지로 여성 3인조 그룹이지만, 그들의 춤이나 노래 그리고 음악은 헌트릭스와 전혀 다릅니다. 물론 누가 우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케데헌>이 케이팝 스타일을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완벽하게 소화해 낸 것과 마찬가지로, <초(超) 가구야 공주!>는 제이팝의 여러 요소들을 합쳐 멋진 버추얼 아이돌로 데뷔시켰습니다. 영미 음악과 다르며, 케이팝과도 같지 않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주는 뮤지컬 애니메이션 한 편이 탄생했습니다. 디즈니의 '브로드웨이', 소니 픽처스의 '케이팝'에 이은 일본의 '보컬로이드' 스타일 뮤지컬 애니메이션의 시작이죠.


이렇게까지 장점이 많은 애니메이션이지만, <초(超) 가구야 공주!>는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음악 장르가 아직 생소하고, 줄거리가 난해한 것이 주요 원인인 듯합니다. 그래픽의 레벨 자체는 TOP이며, 캐릭터 또한 매우 예쁘게 잘 뽑혔거든요. 다만 일본 서브컬처의 모든 영역을 한 작품에 모두 때려 넣다 보니, 어지간한 덕후가 아니고서는 소화하기가 힘든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초(超) 가구야 공주!>는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 향후 일본에서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반드시 '보컬로이드 뮤직'을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시험해 보다 보면, 언젠가 세계적으로 히트하는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만들 날이 오겠죠. 이미 그런 시도들이 진행 중에 있을 수도 있고 말이죠. 뮤지컬 애니메이션 덕후인 저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작품들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즐겁죠. 미국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에서 세계를 놀라게 하는 뮤지컬 애니메이션이 꾸준히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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