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사물은 주어진 가장 완전한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생겼으므로 최고의 완전성으로 신에게서 산출되었다.(제1부 정리33 주석2)”라고 말하며,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존재하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점을 천명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잘못된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존재오류가 아닌 인식오류를 문제 삼았다. 그리고 대표적인 인식오류는 "나 또는 타인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고 열등하다."이다. 이는 자존감의 문제와 직결된다. 자신의 존재가 완전하다는 점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의 자존감은 비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느 정도 회복되는가 싶다가도 금세 바닥을 치곤 한다. 자존감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존재의 완전성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스피노자의 철학이 '용서'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용서 심리학'이라는 낯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로버트 엔라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이다. 전 세계 학계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찌들어 있기에,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실제적인 심리를 다루는 심리학자이기에, 매우 유용한 사례들을 우리에게 많이 제공해주었다. 그가 <용서하는 삶>(시그마프레스, 2014)에서 보여준 용서 프로세스를 대화로 구성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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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 이제 당신은 용서를 깊은 차원에서 바라보기 시작하고 있네요. 다른 사람에게서 인간 존엄성을 보고 그것에 맞게 반응하는 것을 배우고 있어요.
이네즈 : 내가 잘 이해하고 있나요? 가해자가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관계없이,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용서하게 되는 것이죠?
소피아 : 어떤 인간도 피하거나, 무시하거나, 버려서는 안 돼요. 이것에 맞는 적절한 표현은 모든 인간은 타고난 내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인간의 가치는 내재적인 것, 즉 태어날 때 이미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며 무조건적이에요.
이네즈 :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형상으로 만들어졌어요. 주일학교에서 창세기 1장을 통해 배웠죠.
소피아 : 누군가가 하나님을 닮은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면 어떻게 되죠?
이네즈 :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 좋은 존재가 되고, 그러면 나에게도 좋은 존재가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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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대화가 스피노자의 철학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여기서 상담자인 소피아는 내담자인 이네즈에게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이해를 소크라테스 방식의 대화로 끌어내고 있다. 이네즈는 앞선 긴 대화를 통해, 가해자는 인간이며 인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 그런데 인간은 어째서 인간이라는 자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을까? 인간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 존재에 어떤 불완전이나 열등함, 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진정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그러하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은 생태주의의 철학적 기초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기도 하다.
다시 되돌아가면, 가해자는 완전한 인간이지만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고 여기서 (인용하지는 못했지만) 이네즈는 가해자가 사과하지 않을 때에도 피해자가 용서를 해야 하는 상황을 문제 삼고 있었다. 가해자가 내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그를 용서해야 하냐는 것이다. 이네즈의 이와 같은 태도는 '용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우선 용서는 자기치유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유태인들이나 총기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용서의 이유는 자기치유이다. 그리고 내 상처에 대한 내 치유는 가해자의 사과와는 관계가 없다. 뺑소니 차량이 나를 치고 달아났는데, 내가 피를 흘리면서도 뺑소니 범인이 내게 사과하기 전에는 상처를 치료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몸의 치유와 마음의 치유는 그 논리가 동일하다. 가해자의 반성 여부와 관계없이 용서는 자기치유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스피노자 철학을 받아들인 피해자는 가해자를 어떻게 이해할까? 가해자는 사람이다. 헌법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이다. 그는 잘못된 철학을 지니고 살며, 타인의 존재를 깔보고 타인의 존재를 훼손하면서도 사과할 줄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뻔뻔스레 잘 살고 있는 듯하지만, 그의 잘못된 철학은 그에게 끊임없는 정서적 불안과 정신적 동요, 자존감의 하락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겉으로 대단히 강한 척 잘난 척하는 사람이 사실 굉장히 여리고 예민하고 열등감이 심하다는 사실을 현실 속에서 흔히 확인한다. 진정 자존감이 충만한 이는 타인을 해코지하지 않으며,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기꺼이 사과한다. 그러나 자존감이 부족한 이들은 사과하면 자신의 자존감이 더욱 하락할 것을 염려한다. 그래서 항상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벽을 치고 사는 것이다. 따라서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야말로 가장 아픈 환자이며 불쌍한 사람이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한 피해자는 가해자를 증오하는 대신, 연민한다. 피해자는 자기가 당한 일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분노하지만, 가해 당사자에게는 연민을 느낀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마하트마 간디)
사람들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예수는 다름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가 말한 바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저들은 악해서가 아니라, 몰라서 잘못을 저질렀다. 그들은 하나님의 귀한 어린 양이며 존재하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하지만 그들은 진짜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잘못을 저질렀다. 아이러니컬하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좋은 일을 한다고 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못 박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몰랐을 따름이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들이다. 이 때문에 예수는 그들을 용서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용서'라는 중요한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앞으로도 다양한 감정과 인간 심리를 스피노자의 철학으로 풀어보는 글들을 부족하나마 계속 써나 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