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심리학에서 가장 크게 오해되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능동과 수동이라는 개념입니다. 들뢰즈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스피노자 전문가들은 수동이 능동보다 열등한 것이며, 우리는 열등한 수동에서 우월한 능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정반대로 오해한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이 절대적 우세를 점하는 대한민국 학계에서 학자들은 들뢰즈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의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놀랍게도, 들뢰즈에 반대하는 이들도 들뢰즈가 짜 놓은 틀 안에서 반대합니다.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서 채 발을 빼지 못한 학자이며, 이 때문에 스피노자의 철학을 곡해합니다.
몇 년 전에 강신주 선생님이 스피노자의 감정 48개를 문학과 연관해서 다룬 <강신주의 감정수업>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문체도 유려하고 내용도 무척 재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은 스피노자의 철학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의 능동과 수동에 대한 이해가 전혀 뒷받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강신주의 <감정수업>과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으로부터 주로 스피노자 공부를 시작하는 대한민국의 독자들은 십중팔구 거꾸러집니다. 안타깝지요.
그러나 저는 주말에 평안히 즐기는 브런치와 같아야 하는 글이 중노동이 되기를 원치는 않습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한 저의 이해 또한 정확하란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일단 능동과 수동에 대한 전문적 분석을 떠나, 일상적인 현대 언어를 통해 스피노자의 능동과 수동 개념을 대략 짚어보고자 합니다. 뜻밖에도 우리가 쓰고 있는 용법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① 내가 내 삶의 주인일 때, 나는 능동적 삶을 삽니다. 반면에,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내 부모나 상관이나 아내가 내 삶의 주인 노릇을 할 때, 나는 수동적 삶을 삽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의식을 갖고 살 때, 나는 능동적 삶을 삽니다. 하지만 내가 노예 의식을 갖고 살 때, 나는 수동적 삶을 삽니다.
② 내가 수동적 삶을 살 때, 나는 타인의 견해에 작용을 받습니다. 내가 타인의 견해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수동적으로 작용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나 자신의 더 큰 행복을 위하여, 나는 타인의 충고를 기꺼이 환영하며, 타인의 견해를 들어보아서 그것이 내 본성에 비추어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면 능동적으로 수용합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일을 접하든 타인의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심지어 틀렸다고 판단됨에도 불구하고 내 견해를 버리고 타인의 견해를 따를 때, 나는 타인에게 수동적으로 작용을 받습니다. 타인에게 수동적으로 작용을 받는 삶은 주인의식이 결여된 노예의 삶입니다. 여기서 주인과 노예는 사회적 집단과는 상관없습니다. 오직 주인의식과 노예 의식, 즉 사고방식과 관련된 것입니다.
③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게 유익하지 않은데 내게 유익할 것이 틀림없다고 타인이 떠벌리는 아이디어를 나는 타당하지 못한 아이디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가 중요합니다. 가령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돈이 인생의 최우선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인생 뭐 별 거 있어? 돈 많이 버는 게 최고야! 일단 돈만 많이 벌면, 그다음부터는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고 권합니다. 돈은 그 액수와 관계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 결과이어야 합니다. 돈은 내 행위의 결과가 되어야지,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1. 스피노자는 감정의 능동과 수동, 능동적 감동과 수동적 감정이란 표현을 자주 씁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볼 때, 감정에는 능동과 수동이 없습니다. 감정은 오직 능동입니다. 우리는 능동적 사고방식과 수동적 사고방식만 신경 쓰면 됩니다.
2. 또한 능동적 사고방식은 주인의식이며, 수동적 사고방식은 노예 의식입니다. 여기서 주인의식과 노예 의식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가령 대한항공의 조양호 회장과 금호 아시아나의 박삼구 회장은 사회적으로는 갑의 지위에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돈의 노예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에 얽매인 노예 의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들을 자기 삶의 주인이라 보지 않습니다.
3.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기타 연주인데, 부모님은 그것으로는 생계가 유지되지 않으니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강요합니다. 부모님의 강요는 내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 자체에는 죄가 없지만, 적어도 내게 어울리지 않는 아니 타당하지 않은 직업입니다. 게다가 기타 연주로 생계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사회적 편견일 따름입니다. 공무원으로 생계가 유지된다는 생각 또한 사회적 편견입니다. 왜냐하면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내 본성에 비추어 보아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타당하지 않은 관념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스피노자의 (에티카) 원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에티카 제3부 정의1) 어떤 원인의 결과가 그 원인에 의하여 명석 판명하게 이해될 수 있을 때 나는 이 원인을 타당한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원인의 결과가 그 원인 자체에 의하여 이해될 수 없을 때 나는 그 원인을 타당하지 않은 또는 부분적인 원인이라고 한다.
(에티카 제3부 정리3) 정신의 능동은 오직 타당한 관념에서만 생기지만, 수동은 타당하지 않은 관념에만 의존한다.
쉽게 쓴다고 썼는데 읽어 보니, 결코 쉽지 않네요. 하지만 대략을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제 삶에 주인의식을 갖고 능동적으로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