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태평양 같이 넓어질 줄 알았건만 아직도 내 마음의 크기는 살짝 패인 도로가에 비온 뒤 고인 물웅덩이 수준이다. 사회화를 거치면서 쿨한 척 넘기는 일에 능숙해졌지만 여전히 작은 일에도 쉽게 감정이 예민해진다. 생각이 깊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작은 변화를 잘 알아채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예민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난 그런 사람이다.
한때는 이런 나를 그저 부정하고 싶었다. 주변에 한없이 유하고 감정 기복이 없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그들을 동경해 왔다. 비효율적인 감정과 체력소모를 핑계로 침대에 뒹굴거리다 잠으로 시간을 죽이던 날들.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은 내가 속이 깊다며, 철이 일찍 들었다며 칭찬해 왔지만 사실 할머니 말대로 내 마음은 밴댕이 소갈머리다. 여유로운 척 하지만 누구보다 조급하고, 안 부러운 척 하지만 때때로 미치도록 부러워 속이상한다.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이미지와 현실의 나의 갭은 좁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그런데 그 이상의 이미지란 거, 왜 그리게 된 걸까?
왜 좁혀지지 않는 틈을 마감기 한라도 있는 것처럼 혼자서 동동거렸을까?
내가 이런 옹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게 그렇게 바꾸고 싶어 할 일인 거야?
세상엔 여러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 있다면 운동신경이 월등한 사람이 있고, 빨리 끝내놓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유를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냥 나는 그 부류 중 한 꼭지를 차지하는 사람일 뿐. 바뀌려고 노력을 하고 싶다면 하면 취미를 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선까지 하면 되는 일이지만 자기 부정을 시작으로 자존감을 갉아먹으며까지 해낼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방식을 뒤집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하니 흐름이 달라졌다. 한번 옹졸해지면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손에 잡힐 것 같지 않던 내 마음이 손안에 감싸 쥐어지기 시작했다. 레몬을 먹기 싫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면 되는 것처럼, 콩비지로 콩국수를 만들어 먹기 싫으면 들깨 순두부찌개를 만들면 되는 것처럼.
1. 타인의 상황을 넓게 바라보기
지금도 이상향을 쫓으며 부단히 노력은 하지만 나를 다그치진 않는다. 별일 없는 듯 살다가도 옹졸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올 때면 '왜 나왔어?'라며 추궁하기보단 '오랜만이야' 인사한다. 그렇게 뜨겁게 달궈진 상태로 튀어나온 감정은 만지면 오히려 손에 화상 자국만 남는다. 그냥 그렇게 잠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까지 그 감정이 하고 싶은데로 마음을 헤집고 돌아다니게 둔다. 마치 핀볼처럼 그렇게 이곳저곳 헤집고 다닌 감정은 꽤나 힘이 빠진 게 느껴진다. 그렇게 한 김 식고 나서 다시 그 상황을 바라본다. 그럼 양쪽 끝이 좀 더 넓어진 스크린으로 장면을 투영하게 된다. 그렇게 내가 감정을 느끼게 된 상황과 상대의 말이 나오게 된 상황을 조금 멀찍이서 바라보며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솎아낸다.
2. 일기 쓰기
그렇게 상황을 재투영하고 난 후 정리된 마음을 솔직하게, 가감 없이 일기에 옮겨 적는다. 때론 식었던 감정도 일기에 쓰고 나면 다시 벅차오를 때가 있다. 그 감정을 온전히 글에 녹여낸다. 누가 볼까 두렵다면 그날의 일기는 찢어 버려도 무관하다. 그저 날 것의 내 감정 그대로를 마주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이때는 마음을 어루만진다는 느낌보단 횡설수설 두서없는 내 얘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심정으로 몸에 곤두섰던 신경들과 근육들을 하나씩 이완해 나간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쓰는 일은 상대도 나도 힘이 빠지는 엔딩이 나곤 한다.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솔직하게 내 감정을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위안이 된다. 정말이다.
3. 표현하기
일기에 휘갈기고 나서도 식지 않는 감정들이 있다. 그럴 땐 분명히 정리된 감정들을 상대를 탓하지 않는 어조로 이해할 수 있게, 대신 솔직히 표현한다. 상대를 탓하게 되면 책임을 전가받는다는 부담감에 상대의 기분까지 끌어내리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그걸 원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서로 윈윈 하는 건강한 피드백을 원하는 거라면 내 감정에 상대의 책임을 녹이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4. 다른 일 하기 (운동하기)
때론 이 일에 전혀 얽혀있지 않은 사람에게 이런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며 우스갯소리처럼 내 감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렇게 그 당시엔 무겁게만 느껴졌던 일을 가볍게 하고 나면 생각보다 별일 아닌 것처럼 다가온다. 내가 왜 그렇게 까지 화가 났었을까,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그거 정말 서운했겠네' 이해해 주는 친구가 필요할 때도, '그래도 네가 너무했던 것 같은데'라며 팩폭을 날리는 친구가 필요할 때도 있다. 내 주변에 그렇게 다양하게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든든해진다. 변기 물 내리듯 그렇게 씻어 내린다.
운동을 한다. 폭발의 크기가 대, 중, 소로 나뉜다면 대의 경우 쓰는 방법이다. 이렇게 크게 터지는 감정이라면 정말 걷잡을 수 없다. 머릿속으로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그 흐름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시스템 에러가 걸려버린 머릿속에서 터지는 감정을 밖으로 분출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게 입으로 분출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땀으로 분출시킨다. 화를 낼 힘도 없을 정도로 몸을 방전시키고 나면 곧바로 생각나는 음식을 먹는다. 이런 흐름이면 침대에 눕는 순간 꿀잠 보장이다. 그렇게 한숨 잔다. 자고 나면 해결되어 있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눈을 뜨면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