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한 해의 끝자락, 이런저런 생각들.

by 담백

"난 내가 여기서 조금만 더 괜찮아지길 바랐던 거지, 걔가 되길 원한 건 아니었어요.

난 내가 여전히 애틋하고 잘 되길 바래요"


또 오해영을 본 지도 벌써 10년이 다돼 가는데 유독 저 대사가 종종 머리에 맴돈다. 몸에 맞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옷들에 몸을 구겨 넣어 불편하면서도 기를 쓰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어린 시절의 나.


엉엉 우는 오해영을 보면서 그 시절의 나를 투영했던 것 같다. 내가 바라던 조금 더 나은 나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굳이 먼 길을 떠나야지만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묘한 압박감속에서 아득바득 애쓰던 시절.


어느새 정신 차려보니 한 해의 끝자락, 올해도 예상치 못한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상황에선 매번 새로운 고난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지나고 보면 크거나 작은 일로 얼버무려지는 엔딩은 좀 허무하긴 하지만 그런 게 인생인걸.


아무튼 몇 년이나 지나야 가까워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내가 바라는 조금 더 나은 나’를 써내려 보면 한걸음 더 가까워질까 - 싶은 마음으로 적어보는 글.


[뜻뜨미지근한] 사람이 되고 싶다.

; 온도가 아주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사람

예전엔 아이스도 핫도 아닌, 미지근한 물을 마시는 일이 그렇게도 싫었다. 물뿐만 아니지, 사람도, 관계도 무언가 애매하고 확실하지 않은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 느긋하게 생각하면 별일 아닐 일도 조마조마하고 혼자 불안 속에서 외줄 타기 하는 기분이 들면서 주변 상황을, 사람들을 원망했다. 그래서 확신이 들게 하지 않는 사람, 확신할 수 없는 환경에 화를 내고 분노했다. 작은 바람에도 사시나무 떨듯 반응했다. 어떻게 보면 열정이 남아돌아 애먼 데 힘을 쓴 셈이다. 여전히 종종 불안함에 휘청거리곤 하지만 멍청비용도 헛수고만은 아니었는지, 인생에 확신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만큼, 조금은 성숙해진 기분이 든다.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어쩌면 맘에 들지 않았던 건 애매한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남편은 뜻뜨미지근한 사람이다. 표현도 애매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을 때도 많다. 나 혼자 답답해 미치려고 할 때도, 맛있어 미치려고 할 때도 그저 미적지근한 반응이 돌아올 뿐이다.

남편과도 불같은 연애를 하고 싶었다. 나의 첫 연애는 불에익은 돌을 손에 쥔듯 하루하루가 아슬하고 아찔했다. 이곳저곳 화상을 입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로. 그런데도 또 바보같이 불같은 연애를 꿈꾸곤 했다. 아니, 그런게 사랑이라는 건 줄 알았다.

지금 남편과는 연애도, 신혼 생활도 뭐랄까, 돌아보면 그저 잔잔한 파도 위에서 천천히 물결의 방향에 따라 흘러온 기분.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고 나서 더 많은 것들이 확신을 갖기 어려워졌지만 편안하고, 안정적이다. 온 힘을 다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였던 내가, 넓은 바다를 유유자적하는 커다란 범고래가 된 걸까 아니면 원래 범고래였는데 착각하며 산 걸까? 아니면 범고래를 만나 강물이 아니라 더 넓은 바다를 유영하고 탐험하며 강물을 거스르는 일이 전부가 아니란 걸 알게 된 걸까? 어쨌든 지금이 좋다. 이 사람이 좋다.


[은근하지만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속마음이나 의도가 깊고 간절하거나, 야단스럽지 않고 꾸준하며, 정취가 깊고 그윽한 사람

은근한 사람, 좋게 말하면 그윽한 사람, 나쁘게 말하면 미꾸라지 같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런 부류의 사람이 점말이고 싫었다. 사회에 나와서 더 그랬다. 다 같이 하자고 부추기고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은근슬쩍 빠지는 사람들. 일 하는 사람만 하게 되고

사회 초년생 시절, 몇 개도 없는 내 능력을 모두에게 내보이고 인정받고 싶었다. 반대로 내 모든 열정을 불사 질른 결과물을 내보였지만 다른 사람에게 공을 가로 차였을 때, 전 세계에서 내가 제일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처럼 느껴졌던 기억은 누구나 한번쯤 있을 것이다. 문득 중요한 순간에 공을 가로채거나 은근슬쩍 빠지는 미꾸라지 같은 사람들 또한 사실 내가 갖고 있지 못한 능력을 갖고 있어 부러워하는 마음에 화가 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에게 배울 점은 있다고 생각하고 바라봤을 때 보이는 시야는 흐린 눈을 했던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넓고 선명하다.

똑똑한데 멍청한 척, 다 아는데 모르는 척, 자신의 능력을 자기가 조절해서 적재적소에 내보일 줄 아는 사람은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라는 점.

머리로 이해한다고 몸이 따라가기까진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여전히 ‘몸빵’을 추구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내년엔 조금 더 은근한 사람이 되길.


[수수하지만 단아한] 사람이 되고 싶다.

; 옷차림 따위가 그리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제격에 어울리는 품이 어지간한 게 사람

명품 옷을 걸쳐서 품격 있는 사람보단 사람자체가 명품이고 싶다. 늙어가는 맛보단 익어가는 맛이 있는, 그런 풍미 있는 사람이고 싶다.

나이가 들 수록 마음이던 패션이던 덜어내는 것이 가장 어렵고 고급스러운 일임을 느낀다. 얼마 전 백제문화단지를 방문했을 때 여기저기 녹아있던 문구가 내가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느낌을 정확히 묘사해 놓은 것 같아 탁 뇌리를 때리는 듯했다. 백제문화유산처럼 나도 몇천 년을 아우르는 아름다움을 발끝이라도 따라가 보고 싶은, 작은 바람이다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롭지 않게 했다.


[가족에게 좀 더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다

;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운 말투를 가진 사람

‘상냥’한 말투에 마음까지 녹아들게 하는 사람이 참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요즘. 부드러운 음식은 좋아하면서 사근사근한 말투는 왜 이렇게 입에 붙지 않는지. 업무적으로선 최대한 상냥한 톤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가족 앞에서 보이는 본래의 나로선 엄두도 낼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오랜 시간 얽히고설킨 감정의 골에, K ー장녀의 포지션은 부드러운 말투와 가까워지려야 질 수가 없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매년 다짐한다. ‘내년엔 좀 더 상냥하게 말할 수 있기를.’ 그러다 보면 조금 더 부드러운 사람이 돼있길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평범하지만 조금은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최근에 일본드라마 [조금만 초능력자]를 열심히 시청 중이다. 사실 저 정도 초능력이면 나도 갖고 있는 거 아닐까? 싶은 정도의 정말 미미한 초능력들. ( 기(気)를 보내 커피를 살짝만 데울 수 있다던가, 동물에게 부탁할 수 있는 능력이라던가(동물이 부탁을 안 들어줄 수도 있음, 꽃을 피울 수 있는 능력이라던가..) 평범한 사람들이 조금의 초능력을 갖게 되면서 아주 작은 변화로 세상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내용인데 묘하게 점점 빠져들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나도 나만의 초능력을 발견해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년부턴 나를 좀 더 면밀히 관찰해 봐야겠다.


[비즈니스석 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까 백제 문화유산 문구로 폼 잡은 것과는 다르게 조금은 사치스러운? 이상향. 원래 사람은 모순적이니까, 요정도 모순은 귀여운 수준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여행을 가기 위해 일하는 대한민국 국민 중 한 명으로서 늘 비즈니스석에 대한 동경이 있다. 일등석이면 좀 더 좋고요. 아무리 마일리지를 모아도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비즈니스석. 한 번뿐인 신혼여행 찬스로 써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소시민적 사고를 가진 나는 차마 결제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리곤 한이 맺혀버렸다) 다리 좀 뻗고 가는 값이 이렇게 비쌀일인가요.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억울하면 내가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수 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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