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좋은 일은 안 좋은 일 뒤에 숨어있는 걸까

임신 8주 차, 무증상 계류유산과 소파술을 겪으며

by 담백

잘 떠나보내지 못하는 사람

어떤 것이던 정이 붙게 되고 은연중에 생겨난 애착은 그것이 좋은 것이던 안 좋은 것이던 마음속에서 쉬이 떠나보내주질 못하게 한다. 과거의 반짝임만 되짚으며 발전 없이 산다기보단 좋았던, 쓰라렸던 순간들을 곱씹고 또 한 번 그 안에서 얻었던 소중한 것들에 대해 되돌아보는 일을 즐긴다고 할 수도 있겠다. 어쩃건 한마디로 쿨하지 못한 사람이다. 쿨한 것이 멋있는 요즘 시대와는 조금 동떨어진 인간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이런 내가 그런대로 싫진 않다. 13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얼굴과 추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여전히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고이는 사람, 1년 전 이맘쯤 떠나간 우리 강아지 오복이의 사진과 영상들을 돌려보는 것 만으로 어느새 울먹이고 마는 사람이 바로 나다. 몸과 마음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 어떤 것 보다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을 마주하는 순간이 나에겐 가장 두려운 일이다.


오복, 만나기까지 6개월의 시간

첫쨰아이 태명은 생기기도 전에 "무조건 오복이야!"라고 정해놨었고, 남편도 좋아했다. 떠나간 오복이를 그리워하는 지지부진한 내 마음이 오롯이 묻어있는 태명이었다. 이런 것도 다 배움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역시 털어낼 것은 털어냈어야 됐나, 싶다.


오복이를 만나기까지 6개월이란 기다림의 시간은 생각보다 덧없이 길게 느껴졌고, 점점 초조해져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남편과 나 모두 건강한 체력과 체격에,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고 나름 자기 관리에선 평균이상이라고 자부했었기 때문이었다. 해결책을 찾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매번 원인을 파고들었고, 생리 때가 다가올 때마다 극도로 예민해져 갔다. 주변에 임신한 친구들도 늘어가면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왜 안 생길까?'라며 우리 부부의 문제 찾기에 초점이 모이는 듯해 불편하게 느껴졌다.


남편의 올해 목표는 철인 3종 완주였는데, 초반엔 함께 그 꿈을 응원했지만 막상 내 목표인 임신이 망그러져가는 듯 느껴지니 점점 못된 마음이 자라났다. 그런 남편이 건강해 보인다고, 대단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친구들은 그새 자전거를 오래 타서 정자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느니, 둘다 너무 운동을 많이 한 게 문제가 아니냐느니하며 그만두게 하라고 나를 부추겼다. 별생각 없이 던지는 친구들의 말들에 혼자 긁혀돌아오길 반복하다 결국 만남을 점점 줄여나갔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에서 말들이 떠나가지 않고 맴돌아 신경을 곤두세웟다. 작은 설탕 입자가 솜사탕처럼 부풀듯이 내 마음속에서 남편에 대한 미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나갔고, 이런저런 형태로 남편에게 날카로운 말들로 쏘아붙이는 날이 많아질수록 우리 부부의 싸움도 잦아졌다.


비타민D, 엽산, 프로폴리스, 이사비

여자라서 감내해야 할 일들, 할 수 있는 일들, 감사해야 할 일들


남(편) 탓하기, 작은 일을 크게 부풀려 말하기,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가정하며 끝없는 걱정 만들기 등, 오래 함께한 시간만큼 무엇이 가장 그를 상처받게 하는지도 잘 안다.

'나는 이렇게 까지 하는데 너는 왜 가만히 있어?'
'우리 같이 임신을 원하는 거 아니었어?', '철인 3종 꼭 해야 해?'

할 수 있는 건 남편을 괴롭히는 일밖에 없는 내가 나약하게 느껴졌고, 속 시원히 퍼붓고 나서 개운하기라도 하면 모를까,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런 무의미한 악순환이 나와 남편을 점점 더 힘만 빠지게 만들 뿐이였다. 매달 해야 하는 배테기, 임테기, 일자 맞추어 숙제하기 등, 촉각을 곤두세우며 기본적으로 하라는 건 빠짐없이 다 했지만 돌아오는 건 진한 한 줄 뿐인 나날들의 반복. 우리는 언제까지 이 생활을 반복해야 할까, 막막하기만 했다.


끝없이 내 머리를 파고드는 부정적인 생각들, 점점 그렇게 바라지 않던 '남편 못살게 구는 와이프'의 표본이 되어 가는 것 같은 기분, 시간이 흐를수록 힘에 부쳐하는 남편의 모습, 정말이지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하루가 소중한 신혼 생활을 이렇게 내 손으로 불태우고 싶진 않아 궁여지책으로 근로자 정신 상담 프로그램을 신청했고, 선생님은 내 정신이 번득 들게 하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셨다.

"지금 까지 했던 모든 일들을 여자라서 귀찮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단 여자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임신, 정말 ㅇㅇ씨가 하고 싶은 게 맞나요? 아니면 해 보여야 된다는 생각에 혼자 압박 속에 짓눌려 있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 사실 나는 예전부터 아이를 갖는 일에 대한 책임이 무서웠고, 남편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긴 설득 끝에 아이를 가지기로 결정했지만 아직도 깊은 마음 속은 아직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엄마'란 타이틀이 아직 무척이나 두려웠다. 살이 찌는 일도, 업무에 이전처럼 혼을 쏟을 수 없는 일도, 출산으로 몸이 변하는 일도, 일상이 예전 같지 않아 지는 일도 그저 두렵고 마뜩잖은 일인 듯 느껴졌다.



KakaoTalk_20251129_220942601.jpg 남편이 기록한 오복이의 진찰기록

8주간의 여정, 상상 이상으로 행복했던 날들


솔직히 아기를 갖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 조차도 살아남기 힘들었던 한국에서 태어날 그 작고 순수한 영혼의 엄마로서 한 생명의 일생을 책임져야 하는 그 일이 지구를 드는 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날 닮은 아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았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가족이 되고, 긴 시간을 보내며 뻔하지만 이 사람과 함께라면 그 어려운 일도 어쩌면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끝없는 걱정. 살이 너무 많이 쪄서 출퇴근이 쉽지 않으면 어떨지, 업무 능률이 떨어져 주변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기라도 하면 어쩔지, 출산 후 몸 회복이 되지 않으면 어쩌지, 산전, 산후 우울증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입덧은 얼마나 심할지, 생각하고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때 되면 다 해 낼 수 있을 거라는 남편의 대답은 그다지 큰 위안이 되지 못했고, 나는 이런저런 상황을 가정하며 남편을 쪼아댔다.


결국 난포성숙을 위해 배란유도제를 먹기로 결정했고 복용 후 어지럼증과 울렁거림 등 예상보다 부작용이 심했다. 의사 선생님은 부작용이 큰 만큼 약 효과가 잘 드는 거라고 하셨지만 머릿속엔 이렇게까지 해서 임신해야 하는 걸지 의구심만 들었다. 그러다 한 달 뒤, 정말 믿기지 않게 임신을 했고 막상 임신을 하고 나니 지금까지의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임신한지도 모를 정도로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불안할 때도 있었지만) 원래 다낭성증후군의 영향으로 호르몬의 불균형에 휘둘려 예측할 수 없이 감정이 날뛰었던 나로선 처음 겪는 마음의 평화였다. 불규칙하게 날뛰던 기분 변화폭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고 그간 느낄 수 없던 행복감에 휩싸였다. 그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지만 이건 예측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남편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다정했고 예민하게 솟아있던 감각들이 조금씩 사그라들면서 오히려 동그랗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변해가는 내가 신기했다. 배 안에 생명체가 살아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하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무엇보다 오복이와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든든하고 내 몸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날들이었다.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질 않는다.


이번엔 사용할 수 없게된 티켓들

임신소식을 들은 남편은 기쁨보단 걱정에 가득차 얼떨떨한 표정이었고, 남편의 미지근한 반응에 왠지 축하받지 못한 것 같아 기운이 빠졌다. 어차피 일찍 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익히 들어 6주 차에 첫 아기집을 보러 갔고,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라며 소견서를 써주시는 선생님을 보며 먹먹해졌다. 다만 아기집 모양이 좋아 보이진 않는다며 조심스럽게 지켜보자는 선생님의 말씀에 남편은 또 얼어붙었다. 일주 뒤 심장소리를 들으러 오라셨지만 남편의 반응 때문인 건지 뭔가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나를 안정시켜주긴 커녕 본인이 더 낙담하는 남편에게 서운하다며 엉엉 울었고, 그주 주말 남편은 본인만의 방식으로 축하를 건내 주었지만 사실 심장소리를 들으러 가는 날 까지도 설렘보다는 기저에 깔린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집에서 보낸 2주간

선생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7주 차 오복이는 심장박동이 약 80 bpm으로 주수에 비해 훨씬 느렸다. 선생님은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10주 차가 되면 안정기이니 그때까지만 조금 더 조심해 보자고 나를 다독여주려 하셨지만 방문할 때마다 주차가 밀려서인지 느낌상으론 3,4,5,6,6,6...

6주 차의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때쯤이면 보통 2주 뒤에 방문하게 되는데, 1주 뒤에 보자고 하셨다. 성장이 느린 아이라면 다음 주에 분명히 심장박동이 빨라졌을 거고 약한 아이라면 경과를 봐야 할 것 같다고. 남편의 표정은 또 한 번 어두워졌다. 진료실에서 나오자마자 비상계단으로 뛰어갔다. 부들거리며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그렇게 남편 품에 안겨 몇 분을 울었다. 안 좋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엄마의 문제가 아니라 아기의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롯이 쉬는 것과 안정. 그뿐이었다.


시부모님이 보내주신 고구마, 모두 다르게 생겼다

카더라 통신, 무의식 중의 비교

30대가 넘어가니 주변 친구, 언니들 할것없이 너도나도 임신소식이 이어졌다. 한방에 돼서 태명이 ‘한방이’인 칟구, ‘대장이’가 몇 개월 형이니 나중에 예의 잘 지키라는 친구 등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해 줄 사람들만 넘쳐나는 현실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많은 친구들이 오복이의 근황을 궁금해했지만 나는 그들과 같이 들뜬 마음으로 원하는 답을 줄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은 예후가 좋지 않다는 답변에 친구들은 당황하며 긴 말 잇지 않고 넌 건강하니까 괜찮을 거라고, 힘내라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회사 측 배려 덕분에 마지막 검진 후 1주간 재택을 하며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모두가 별일 없을 거라며 우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했지만 결국 객관적으로 결과가 호전될 확률은 반반, 또는 그 이하였다. 8주 차, 9주 차, 10주 차 유산을 검색하며 최악의 결과에 대비해 매일 가능한 만큼 조금씩 떠나보낼 마음을 준비했다. 집 밖에 나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고, 최소한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 해보고 싶었지만 역시나 거대한 무기력이 찾아왔다. 흔히 있는 일이라지만 또 내 주변 지인들 중에선 내가 처음 겪는 일이라 왜 이런 일이 나한테 닥쳤을까, 암담하고 또다시 나만 뒤처진 기분, 그렇지만 또 한편으론 차라리 친구들과 다른 페이스로 뒤따라가는 편이 그냥 후련할 것 같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했다. 그 좋아하던 아이스커피도 멀리하고 항상 몸을 따뜻하게, 졸릴 땐 졸린 만큼 자보고, 스트레스도 아무렇지 않게 넘겨보고,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조금이라도 힘이 들면 누워있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 인생 첫 수술, 그리고 이후의 생각들

새 잎이 나고 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혼돈의 한주가 지나고 그날이 왔다. 이른 저녁 엄마와 남편을 대동해 병원을 갔다. 먼저 초음파실에 나 혼자 먼저 들어가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준비했던 만큼 굳게 마음을 먹었다. 오복이의 크기는 한눈에 봐도 전 주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선생님께선 말없이 심장소리를 들어보자며 소리를 켜셨지만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파동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예상한 대로다. 초음파실에서 문을 열고 나와 초조해하는 엄마와 남편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그게.. 무슨 의미야." 좋지 않은 느낌을 감지한 엄마는 목소리가 떨렸다. 답은 명확했다. 오복이의 심장과 성장은 멈췄고, 수술을 언제 할지만 결정하면 될 일이었다. 선생님은 지체할수록 좋을 건 없다며, 간단한 수술이니 크게 겁낼 것 없다며 내일 첫 수술을 추천하셨다.


인생에서 처음 받게 되는 수술이 소파술이라는 게 당황스럽고 믿고싶지 않을 뿐이었다. 출산의 고통은 수백, 수천번 생각해 봤어도 유산의 고통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괴한에게 너무 놀라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갈기갈기 마음이 찢겨지는 기분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내일 아침 가장 빠른 수술시간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입맛이 없어도 수술 전엔 든든히 먹어둬야 한다며 엄마는 꾸역꾸역 내가 밥을 먹는 모습까지 보고 집으로 돌아갔고,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남편과 누워 어제 보다 남은 드라마를 봤다. 이제 자자며 남편이 불을 끄고 침대로 돌아와 나를 안아주었고, 그때부터 정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라는 표현이 이런 거구나, 안간힘을 주지 않아도 주룩, 주르륵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휴지 한통을 다 쓸 때까지 쉴 새 없이.


그저 무섭고 너무나도 억울했다. 그렇지만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도 부질없는 일이고, 이제부턴 오롯이 혼자 견뎌내야 하는 일이었다. 수술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간이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며 기다리다 간호사 선생님의 부축을 받아 수액을 들고 천천히 수술의자를 향해 걸어갔다. 수술의자가 별 것 있겠냐 싶었지만 생각보다 더 단출하고 소름 끼치는 비주얼이었다. 그곳에 앉아 기다리는 시간이 또 하염없이 길게 느껴졌다. 마취액이 머리끝까지 와닿는게 느껴지고 눈을 뜨니 다시 아까 누워있던 침대 위였다.


조금씩 하반신의 감각이 돌아왔다. 당장이라도 수술실 앞의 남편과 아빠를 보러 나가고 싶었지만 남은 수액이 끝나기만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였다. 간호사 선생님께서 앞에서 보호자 분이 기다리고 계신다고, 이제 나가셔도 된다고 어지럽진 않은지 살펴주셨지만 "괜찮아요, 감사합니다."라고 대답만 간단히 남기고 탈의실로 향했다. 탈의실 문을 닫자마자 어지러움에 다리가 풀렸다. 그렇게 몇 분 얼어있다 옷을 갈아입고 수술실 문을 열고 나가자 아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다시 어지러움에 아빠한테 쓰러지듯 안겨 몇 분이고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끝난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결 슬픔이 가신 것 같다가도 여전히 방심하는 틈에 어느새 눈물이 난다.



Bad things at times do happen to good people.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에게 생긴다.
E4qECMcVoAgW7dd.jpg 가장 힘이 되었던 위로의 문장


진짜 누군가의 엄마가 되기 전 예습을 했던 시간이라고 생각하는건 어떨까 ?

유산이 처음이라 억울하기도 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부끄럽게 느껴지진 않는다. 처음인 만큼 주변에서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고, 그들과 함께 슬픔을 나눴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약은 없지만 내가 정말 괜찮아질 때까지 충분히 슬퍼하고 눈물 흘릴 생각이다. 이 감정이 말끔해지고 마음이, 또 몸이 다른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면 또 한 번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기뻐할 수 있도록. 오복이와 함께한 길고도 짧았던 시간 참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내가 아닌 우리는 함께 큰 산을 넘으며 부부로서 더 단단해졌다. 없었던 일이었으면 좋겠지만 없으면 안 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임신 기간 동안 많은 블로그 글을 읽으며 도움을 받았지만, 만약 일이 잘못된 유산에 관한 글을 쓰게 된다면 좀 더 사실적으로 온 힘을 담아 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예비 엄마들, 잘하고 있어요. 지금은 괜찮지 않지만 곧 우리 모두 괜찮아질 거예요.


오복아 고생 많았어. 너를 만나서 무척이나 기뻤어. 많이 힘들었을 텐데 정신줄 놓지 않고 뒷바라지해 준 남편, 하루도 빠짐없이 딸을 챙겨준 엄마, 시부모님께 다시 한번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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