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실격 Sep 18. 2022

연쇄 살빙마

회사에서 스트레스 푸는 법

나는 아침마다 얼음을 죽인다.


무슨 얼어 죽을 소린가 싶지만 사실이다. 나는 매일 아침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얼음을 죽인다. 살인은 얼음에 쓰기 적절치 않다. "빙"자로 바꿔야 정확하다. 어쩐지 프랜차이즈 상호 같다.  


살빙은 이렇다. 출근을 한다. 그래 맞아. 여기서부터 잘못됐다. 출근만 안 했다면 탕비실 얼음도 무사다. 여러모로 출근은 만병의 근원이다. 노트북 전원을 켠 뒤 탕비실로 향한다. 본격적으로 근무가 시작하기 전에 커피를 주유해야 한다. 사무직을 굴러가게 만드는 원료는 당과 카페인이다.    


비실엔 커피 머신과 소다 머신이 있다. 콜라를 좋아하지만 오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탄산은 너무 신나는 맛이다. 출근 한 아침부터 그럴 수는 없다. 그게 너무 재밌다는 이유로 출근길에 신서유기가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자면 탄산은 퇴근에 가까운 음료다.

 이열치열일까. 혹은 오랑캐를 오랑캐로 잡는 전략이랄까. 아주 쓴 커피가 필요하다. 조금이라도 출근의 쓴 맛을 덜어야 한다.


긴 컵에 얼음을 채우고 순서를 기다린다. 아침 탕비실은 붐빈다. 다들 비슷한 마음이겠지. 순서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도 스몰 토크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늘 날씨가 좋다, 신발 새로 사셨냐 등등. 아이스 브레이킹이라고 하나. 나도 비슷한 걸 준비 중이다. 멋쩍게 핸드폰 하면서 엿듣다가 앞사람이 떠난 자리에 컵을 올린다.


커피 종류는 많지만 내 픽은 항상 에스프레소다. 컵이 두 개 그려져 있는 투샷 버튼을 콕 누르면 "윙~~"하는 소리와 함께 뜨겁고 꼬소한 커피가 졸졸졸 쏟아진다. 산미가 없는 원두라 다행이다. 신 커피는 딱 질색이다. 먹으면 복불복 벌칙을 당한 것만 같다.


첫 살빙은 얼음산 꼭대기부터 시작된다. 뜨거운 커피를 만난 얼음은 용암이라도 닿은 듯 녹아내린다. 우르르르. 첫 번째 얼음이 액체가 되고, 다음 얼음에 균열이 생긴다. 떨어져 내린 커피와 녹아내린 얼음이 만나 컵 안엔 물 웅덩이가 생긴다. 아직 냉기 가득한 밑 얼음이 둥둥 부유한다. 지구 온난화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에서 영상 자료로 나오는 빙하들 같다.


묘하게 얼음산이 붕괴되는 과정을 보는 일이 재밌다. 해방감도 생긴다. 변태 같나?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꺄르르 소독차를 뒤쫓는 것처럼 어떤 일이 꼭 이유가 있어야 재밌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파블로프 견처럼 카페인에 학습된 걸 수도 있겠다. 정확히 콕 집어 말하기 뭐하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한동안 내 아침 루틴이었다.


그러던 중 그럴싸한 생각이 들었다. 


아침 드라마를 보다보면 화가 잔뜩 난 임원은 괴성을 지르며 책상을 뒤엎는 장면이 나온다. 물건도 마구잡이로 던진다. 실제로 가까운 업계 회사 사장님 중엔 재떨이를 던지는 분도 있다고 했다. 우당탕탕 사무실을 뒤엎으면 화가 풀릴까? 나는 해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내가 사무실을 뒤엎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책상을 뒤집기엔 순발력이 좋다. 물건을 던지기 전 값을 가늠할 거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모니터를 잡아 휙 던져야겠지만, 나는 모니터를 잡은 후 마우스로 손을 옮길 거다. 그렇게 마우스를 던지려다 아뿔싸 이건 내가 존경하는 대리님이 생일날 사주신 마우스인 걸 깨닫게 되면 던질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잡는 물건마다 사연을 떠올리면서 주저하다 보면 화가 진정된다.


두 번째는, 회사에서 화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회사는 화 공장이다. 무리한 요구를 받거나, 잘못을 넘기는 옆에 부서를 보면 화가 난다. 마찬가지로 결정을 안 내려주는 상사나, 알려준 적 없으면서 알아서 잘해보라는 선배들도 그렇다. 만약 그럴 때마다 책상을 뒤엎어야 한다면, 가구 회사를 다니더라도 뒤엎을 책상 수가 모자라다.


나에겐 살빙이 책상 뒤집기 축소판이다. 정말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 될지 모르겠지만 컵 속 작은 세계만큼은 내 의지대로 쌓은 뒤 우당탕탕 무너트릴 수 있다.


정갈한 얼음 산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이상한 쾌감이 솟구친다. 첫 번째 도미노를 밀어뜨려 질서가 붕괴되는 걸 관망하는 기분. 게다가 살빙은 카페인이란 보상도 뒤따른다.

 그렇게 나는 화가 나면 조용히 일어나 탕비실로 향한다. 얼음으로 컵을 가득 채운다. 머신에 올린 뒤 투샷 버튼을 꾹 누른다. "윙~~"하는 소리와 함께 졸졸졸 커피가 떨어지고 소우주가 붕괴한다. 우당탕탕.


이래서 장기근속자들이 카페인 만성이 되나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