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이 조금 지났다. 옆 팀 전화가 울린다. 입사 두 달 차였다. 신호가 3번 울렸는데도 잠잠하다. 아직 복귀 안 했나? 사수에게 배운 대로 수화기를 들어 늠름하게 전화를 당겨 받는다. 모든 전화가 빚 독촉 같던 입사 한 달 차엔 꿈도 못 꿀 일이다. 어엿한 두 달 차다. 메모를 남기면 된다. "대신 받았습니다 ~~ 팀 ~~ 입니다"를 말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당겨 받은 전화에서 영어가 나온다. 토익에선 들어본 적 없는 불친절한 악센트다.
침착하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잘 차리면 된다. 근데 저 말은 호랑이 굴에서 탈출한 사람이 남긴 말일까. 혹시 유언 아니었을까. 헛튼 생각에 빠질 시간이 없다.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다. 학창 시절부터 영어는 주특기 과목이다. 아일랜드로 어학연수도 다녀왔고 오늘 아침에도 전화 영어 수업했다. 지난 수년의 ABC 공부가 이 순간을 위한 준비였을 지도 모른다. 차분히 어느 회사, 누구누구라고 밝혔다. 그렇게 영어로 대답하는 순간 고요한 사무실 공기가 살짝 꿈틀거렸다.
무료한 직장인은 화젯거리에 목말랐다. 동료들도 마찬가지. 신입사원이 처음 내뱉는 영어는 군침도는 관심사다. 타다닥거리던 키보드 소리가 잦아든다. 눈은 모니터에 고정한 채 귀를 쫑긋한다. 옆 대리님 귀가 더 크게 보이는 기분이다.
다급해진다. 영어 오디션에 참가한 기분이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혹시 건너편에 SKY 나온 과장님께서 듣고 계실까봐 겁난다. 과장님은 학벌주의가 강해서, 이번 영어 오디션에 실패한다면 또 다른 확신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지극히 피해망상적인 생각에 압박감만 높아진다.
수화기 건너편 상대방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듯하다. 차라리 아주 유창한 사람을 만났으면 좋았을 걸. 재수 없다.
상대는 알파벳을 더듬거리며 캐나다 사업팀이냐고 물었다. 모르겠다. 파티션 너머로 당겨 받은 전화라 정확한 부서는 모른다. 그렇지만 캐나다는 아니다. 캐나다 팀은 우리 부서와 한참 떨어져 있다. 전화벨 소리가 닿을 리 없다.
동료들이 듣고 있단 생각에 한 껏 여유를 부린다. 이런 전화는 수도 없이 받아 봤다는 듯 차분히 "죄송하지만 제가 전화를 당겨 받아서요, 혹시 찾으시는 분 성함이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아니 묻고 싶었다. 그런데 입 밖으론"아 죄송하지만"까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 "i am sorry but.. umm.. i just.."
만약 전화 당겨 받기가 "pick up"인 걸 알았다면 멋진 신입 사원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하염푸 "i am sorry but umm..This is not my call..This is not my call"만을 되풀이했다.
이것은 마이콜이 아닙니다.. 아아.. 이것은 마이콜이 아닙니다..등에서는 시냇물처럼 땀이 졸졸 흘렀다.
위기는 한 번 더 찾아왔다. 애초에 싸움이 아니었지만 승기를 뺏겼다. 상대방 영어가 만만 하단 것에 안심했다는 듯 그는 물음을 추가했다. "내가 특별히 찾는 사람은 없고, 캐나다 시장 관련해서 전반적으로 질문하고 싶어서, 혹시 적절한 사람 있다면 네가 안내해줄래?"라고 물었다. 수능과 토익으로 단련된 귀다. 듣기는 기가 막히다. 다만 답변해 본 적이 없다는 차이만 있을 뿐.
이미 패닉이 된 상태에서 탈출구를 찾기 어려웠다. 머릿속에선 "당겨 받지 말았어야 하는 데"만을 생각하면서 귀신에 씐 것처럼 머릿속에선 "This is not my call.. this is not my call"만이 맴돌았다.
내가 대답을 주저하자 상대방은 "Excuse me?"라고 물었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i am sorry but i can't here you"라는 거짓말이 너무 멋지게 튀어나왔다. "미안한데 전화가 잘 안 터져" 초라한 영어 실력을 국제 전화 통신 문제로 바꿔버리는 훌륭한 재치였다. 뭐로 가든 서울로만 가면 된다.
상대는 당황했다. "내가 끝내는 말에 정확히 대답하던데?"싶었을 거다. 역습이다. 오히려 이번엔 내가 "Excuse me?"하며 되물었다. 우린 어차피 엇갈린 사이다.
한 두 번의 "미안한데 잘 안 들려"후 나는 "5분 뒤에 다시 전화해줄래?"라고 물었다. 상대는 의아해했지만 별 수 없었다. 그리고 5분이 지났다. 아니 5분보다 더 됐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파티션 너머로 저 어디선가 무수한 벨들이 울렸고, 세 번을 넘긴 건 없었다. 그러니 뭐, 적절한 사람을 찾아갔겠지.
막상 옆 자리 대리님은 별 반응 없었다. "전화가 잘 안 터져요?" 라며 묻지 않았고, "영어 잘하시네요"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둘 다 아니었으니까. 그저 무심히 모니터로 메일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분의 무관심이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