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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실격 Nov 27. 2023

지나간 한 세대와 이데올로기를 근사하게 보내주는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지난해 소설가들이 꼽은 2022년 최고의 소설 중 한 권이었다. 나는 이 지표를 신뢰한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윤성희 작가의 "날마다 만우절"을 이 리스트를 통해 접했고 두 권 모두 아주 만족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강화됐다. 나에게 소설가들이 꼽은 소설은 책을 선정할 때 아주 공신력 있는 지표다.

 세련된 표지와 입에 착착 감기는 제목이 이 책을 읽고 싶던 또 다른 이유였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제목은 어쩐지 가족의 깊은 정서를 건드리면서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문학으로 읽히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몇 장 넘기지 않고서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이 책은 절대 제목처럼 말랑말랑한 소설이 아니고, 표지같이 초록 초록한 소설이 아니라는걸.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 책은 아버지의 부고 후 3일 동안의 이야기를 화자인 딸의 시선에서 기록한 소설이다. 제목에서의 해방은, 육체로부터의 해방인 셈이다. 화자의 아버지는 오래전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그 이력 덕분에 주인공 또한 일평생 "빨갱이의 딸"로 살아왔다. 주인공이 무척 싫어하고, 견디기 힘들어하는 타이틀이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 동네에 돌자 장례식장에 조문객이 하나 둘 찾아오고, 찾아오는 조문객들은 저마다 아버지와 이런저런 사연이 있어 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시점 플래시백 한다. 술 친구 아저씨도 있고, 그 오래전에 생사를 넘나들며 전쟁터를 누비던 전우도 있다. 아버지가 자주 드나들던 단골집 아가씨도 조문을 온다. 또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아버지를 친 아버지처럼 모시던 학수도 3일간 자리를 지킨다. 

 

이 소설은 주인공 "나"가, 아버지의 죽음이란 사건으로 "빨갱이이고, 술주정뱅이이자, 옛 영광에만 빠져살고, 책으로만 농사꾼"인 줄 알던 아버지를, 여러 역할과 편견에서 해방시키며 한 발자국씩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3일간의 장례식을 통해 조금씩 더 아버지를 이해하고, 교감한다. 나는 이런 종류의 인물에 마음이 뺏긴다. 그, 그녀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 여러 사건과, 이야기를 거치면서 이내 점점 허물어져서 이내 소설이 끝마칠 때쯤엔 더 나은 세계로 발돋움하는 종류의 인물들. 소설 속 주인공이 꼭 그렇다. 

 주인공은 조문객을 만나면서 단순히 아버지를 넘어 세대와 이데올로기 등, 그녀가 이전엔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것에 공감해 나간다.


또 다르 게, 이 책은 "신념에 관한 책"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아버지는 잘 산 인생일까?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가 평생 기대온 사회주의란 이데올로기는 실패한 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을 기준 삼아 일평생 신념 있게 살아온 그의 삶 자체가 실패한 건 아니다. 그것을 칼같이 구분 지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믿는 대상의 실패가, 믿음 자체에 대한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북적북적한 장례식장이 그의 믿음의 결과다.

주인공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아버지를 온전히 한 명의 개인으로서 마주한다. 거기엔 빨갱이라는, 전우라는, 누군가의 멘토라는, 치매 환자라는, 주정뱅이라는 사람은 이제 없다. 그저 서툴지만 나름 그의 방식대로 딸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명의 소박한 아버지가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가 이걸 깨닫는 묘사는 정말 가슴 아프게 읽힌다. 

나는 이 책이 "지나 간 한 세대와 이데올로기를 우아하게 보내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2083년이 돼 소위 말하는 MZ 세대가 죽을 나이가 되면 우리 다음 세대로부터 어떤 안녕을 받을까. 우리 세대는 이 지구에 어떤 흔적을 남길까. 그런 생각을 하니 문득 삶이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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