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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실격 Nov 28. 2023

우리에겐 "조르바"다움이 필요하다

그리스인 조르바

책을 좋아하면 마음속에 부채 같은 책이 몇 권 있기 마련이다. 나에겐 그리스인 조르바가 그중 한 권이었다. 스무 살 초반에 호기롭게 펼쳤다가 금방 덮었다. 아주 오랫동안 끝마치지 못하다 올해 드디어 다 읽었다.


이 책은 분량이 길다. 그래서 오래 걸린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은 서사라고 할 만한 게 적다.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는 말이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지식인, 책벌레인 "나"가, 경험주의, 실존주의, 혹은 지금, 여기에 가장 집중하는 "조르바"라는 인물과 함께 갈탄 사업을 시도하다가 끝끝내 사업엔 실패하는 이야기다. 물론 그 와중에 사랑 이야기도 있고, 종교적인 이야기 등이 켜켜이 쌓여 있다. 하지만 주요 서사는 "나"가 조르바를 관찰하는 형태다.


자유롭다는 건 더 이상 자유를 구하지 않는 상태이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조르바는 자유롭다. 그는 뜬구름에 가장 반대쪽에 있는 사람이다. 직관적이고, 본성에 충실하다. 이와 반대로 관찰자인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조국을 노여워하고, 관념적인 것을 그리워한다. 그러니 조르바는 "나"가 이해되지 않고, "나"는 조르바가 이해되지 않는다. 누군가 이 책에 대한 비평에서 그리스인 조르바 속 "나"는 Book smart, "조르바"는 Street smart라고 정의하더라. 동의한다. 둘은 달라서 서로에게 끌리고, 달라서 우정이 깊다. 


조르바는 니체의 "초인"과 닮았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매일 새로 태어나는, 그래서 세상 만물에 매번 감탄하는 사람이다. 매 끼니마다 밥이 너무 맛있어서 놀라고, 날이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그 새로움에 매 순간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국가, 종교, 인종, 나이는 손에 닿지 않는 먼 이야기다. 조르바는 그리스라는 국가보다는 눈앞에 와인을, 종교라는 구원보다는 하룻밤 여인을 뒤쫓는 일에 급급하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조르바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싯다르타도 이 세계관 끝판왕 인물이다. 그는 Book과, Street 모두에서 스마트한 사람이다. 조르바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한때는 국가를 위해 싸웠다. 손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투쟁했다. 조국과, 이상, 정치와 정의가 그러한 예시다. 그렇지만 길을 걷던 어느 날 조르바가 전쟁에서 죽였던 사내 자식들이 굶주려 있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러자 그 애국심 넘치던 투사 조르바도 일순 모든 것에 염세를 느낀다. 


말하자면 한 쪽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그 반대의 세계도 균형 있게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헤르만 헤세의 인물들과 닮았다. 나는 이런 입체적인 인물이 끌리더라. 


나는 조르바의 모든 점을 긍정하진 않는다. 그는 광인에 가깝고, 절대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에 이른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방향성에 대해선 동의한다. 조금 더 나가서 한국 사회에선 어느 정도 "조르바다움"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조르바다움"이란 약간 "I don't give a shit"의 마음으로, 너무 남의 시선에, 사회적 압박에, 혹은 규칙에서 자유로운 태도를 말한다. 

 물론 모든 종류의 "I don't give a shit"은 아니다. 그랬다간 사회가 무질서해지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사회적 압박, 혹은 삶의 생애 주기가 획일화됐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조르바다움은 분명 긍정적인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사회적인 관점이 아닌 철저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조르바다움으로 생각한다면 "남들은 그렇다지만, 나는 이렇게 할래, 이게 내 마음에 드니까"란 태도로 살 수 있다.


사실 이 책이 20C에 쓰였다는 점에서, 분명 오늘날의 윤리적인 잣대에서 거슬리는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다. 가령 모든 여성이 대상화된다거나, 조르바의 언어가 정돈되지 못하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그런 것을 충분히 발라낼 수 있는 선구안이 있다면 이 책의 장점만 취할 수 있을 거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좋은 책인가라고 물으면 확신을 갖진 못하겠다. 그러나 "조르바"가 매력적인 인물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완전 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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