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고객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는 대표
웨딩홀 로비에 다섯 명이 모였다. 사진작가 둘, DVD 작가 둘, 그리고 아이폰 스냅 작가 한 명. 서로가 서로를 힐끔거린다. 소개팅인 양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마침내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신부님이 보내준 PPT 보셨어요? 그 정도면 호텔 예식을 하셔야겠던데”
우리 업체는 본식 전 간단히 전화 상담을 한다. 보통은 결혼 이틀 전쯤. 몰래 준비한 이벤트는 없는지, 예물 교환은 있는지, 직계가족이 어디까지인지를 체크한다. 특별한 장면이 있다면 잘 담아야 한다. 뻔할 수 있는 결혼식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일 테니까. 우리는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꼭 사전에 확인한다.
지난달, 여름 초입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그 주 신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분한 말투가 넘어왔다. 하지만 어쩐지 경계심이 묻어있었다. 몇 마디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깐깐함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레이더가 켜진다. 상대에 따라 어휘와 목소리 높낮이를 결정하는 게 세일즈의 기본이다. 호락호락한 고객이 아니다. 나는 평소보다 두 옥타브 친절도를 올렸다.
신부는 전화로는 설명이 어렵고 PPT 파일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금요일에 20페이지짜리 파일이 도착했다. 근래에 내가 회사에서 본 기획안 중에서도 가장 정갈했다. 역시 대기업 사무직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감탄과 동시에 "이런 사람이 후배면 참 든든하겠지만, 상사면..... 조금은 힘들겠다"싶었다.
PPT는 총 4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었다. ‘찍어야 할 것’과 ‘찍지 말아야 할 것’이 적혀 있었다. 신랑 신부가 좋아하는 사진 스타일과 레퍼런스가 첨부돼 있었다. 특이사항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모순된 주문이 왕왕 있었다. 예를 들어, 보내준 예시 사진에 신부 입장 씬에서 정면이 있었고 그 거리감과 비슷하게 측면 사진도 보내왔다. 우리는 2인 촬영이니까 그거까진 가능하다. 그런데 거기서 그걸 바라보는 신랑 표정, 에스코트하는 아버님의 그렁그렁한 눈물 거기에 하객들이 다 보이는 광각까지 있었다. 그 모든 장면을 다 담으려면 작가가 3명은 더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요구였다.
그렇다고 결혼 하루 앞둔 신부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이런 이유로 이건 안 돼요"라며 초 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우리 팀에 비상이 걸렸다. 이건 평범한 신부가 아니다. 촬영 실력도, 응대 능력도 평소의 두 배는 돼야 한다. 실장급 촬영자가 대표 촬영자로 교체됐다. 촬영 실력도 실력이지만, 까다로운 고객을 어르고 달래는 건 대표의 전문 영역이다.
토요일 아침, 우리는 평소보다 더 일찍 도착했다. 촬영 전 로비에서 다른 팀들과 마주쳤는데, 그들 역시 공포의 PPT를 받았다고 한다. 다들 눈빛이 심각했다. DVD업체는 여차하다간 법적 분쟁으로 갈 수 있겠다며 안 웃긴 농담을 했다. (나중에 그 업체가 실제로 몇 년 전에 다른 신부와 소송이 오갔던 경험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신부가 도착했다. 긴장했던 것보다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목소리를 한 톤 더 높여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리허설 촬영, 선 원판 촬영이 끝나고 본격적인 식이 시작됐다. 우리는 PPT를 손에 쥔 채 마치 전쟁터에서 지도를 보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한 컷 한 컷 점검하며 촬영했다.
그리고 중요한 포인트. 현장에서 신부의 요청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역제안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신부님, 요청하신 컷은 버진로드 끝에서 잡는 게 맞긴 한데요, 지금 꽃 장식이 생각보다 듬성듬성해서 안 예쁠 수 있어요. 그 시간에 자연광 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베일 컷을 찍는 건 어떨까요?”
"신부님, 레퍼런스는 어두운 느낌에 흔들리는 사진 이미지를 주셨지만 여기는 밝은 홀이라서 그런 느낌이 잘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데, 일단 제가 몇 컷 찍어본 거 봐보시고 계속 그렇게 할지 말지 결정하시겠어요?"
그렇게 신부가 던진 요구는 현장 컨디션에 맞게 조금씩 수정돼 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신부가 준 PPT는 현장 상황이 고려돼 있지는 않았으니까. 오히려 현장 경험으로 신부의 제안을 조정하기 시작하니 신부는 우리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찍어갔음에도 우리는 그녀 주문의 70%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애초에 5시간짜리 호텔 예식에서나 가능할 분량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채우려 모두가 뛰어다녔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부는 피로연까지 마무리했다. 대표는 신부에게 인사를 건넸다. 촬영은 끝났다. 이제 장비를 정리하면 되는 순간이었다. 오늘 참 길고 힘들었던 촬영이다. 그런데 대표는 카메라를 풀지 않고 그대로 쥐고 있다. 대표님한테 정리 안 하냐고 묻자, 대표는 나에게도 아직 장비를 다 풀지 말라고 답한다.
“이런 신부는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한 번 더 꺾어줘야 해요. 1분 남은 노래방에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중에 20분 서비스를 받아 횡재하는 그 느낌처럼. 또 100개의 좋은 리뷰보다 한 개의 나쁜 리뷰가 더 치명적인 거 알잖아요. 15분만 더 찍고 갑시다. 실장님 커피 사줄게”
그리고 10분 후, 대표는 다시 신부에게 다가갔다.
“신부님, 혹시 조금 더 시간 괜찮으실까요? 원래는 아까 촬영이 끝난 거였는데, 저희가 가려고 보다 보니 2부 드레스가 너무 예뻐서, 부모님과 야외 컷 몇 장만 더 찍으면 진짜 예쁜 사진이 나올 것 같아서요. 지금 햇빛도 딱 좋고요”
신부는 거의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너무 감사해요”
나는 대표가 까다로운 신부를 해결하는 방식에 감복했다. 딱 15분 더 일하는 걸로 차후에 나올 컴플레인을 원천봉쇄 해버리기.
며칠 후, 그녀는 리뷰를 남겼다. 너무 만족스러웠다고. 사진도, 응대도, 세심함도.
역시, 대표는 대표다. 사진만 잘 찍는다고 이 일을 오래 할 수 없다. 결국 사진 촬영도 사람 마음을 훔치는 게 중요하니까. 고객을 응대할 때에는 그런 조금의 쇼맨십도 필요하단 걸 배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