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는 겸업 금지
중요한 식순은 마쳤다. 원판 촬영만 마치면 1부가 끝난다.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촬영이었다. 신랑 신부 컨디션도 좋았고 조명도 적재적소였다. 촬영하면서 굳어있던 몸에서 스르르 긴장감이 빠져나가며 안도감이 채워진다.
신랑 신부를 중앙에 위치시키고 하객을 불러낸다. 오랜만에 만난 하객들은 밀린 이야기를 나누느라 산만하다. "어깨 사이사이로 얼굴이 잘 보이게 서 주세요"라고 요청하며 그늘진 얼굴이 없는지 살핀다.
원판 촬영은 숲도 보고 나무도 보는 일이다. 양 쪽 볼륨이 균형되지 않다면 숲의 실패고, 앞사람 어깨에 잘린 얼굴은 나무의 실패다. 뻘뻘 땀 흘리며 정렬시키던 중 신부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야 박지수 왜 이렇게 늦었어"라며 하객과 반갑게 인사한다. 속으로 "박지수? 옆팀 선임이랑 이름이 똑같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 차가 너무 막혔어 미안해"라며 어제 사무실에서 들은 목소리가 답한다.
살짝 고개를 돌려 실루엣을 살핀다. 공정관리팀 박지수 대리 얼굴이 달 덩어리처럼 떠 있다. 이거 참 나가리다. 경찰을 마주친 지명 수배범처럼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올렸다. 혹시 이런 날이 있을까 싶어서 늘 턱에 걸쳐놨었다. 쓸 일 없기를 바랐는데. 도망치듯 중앙 버진로드를 넘어서 신부 쪽에서 신랑 쪽으로 넘어갔다.
이미 신랑 쪽 대열을 정리 중이던 작가가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목소리를 낮추며 "신부 쪽에 회사 사람 있어요"라고 전한다. 메인 작가도 이 일을 시작하기 전 10년 정도 회사를 다녔다. 그 덕에 내 당혹스러운 온도가 그대로 전해진다. 남은 원판 촬영을 메인 작가에게 넘겼다.
그럼에도 나는 돈을 받았고, 그랬기에 사진은 계속, 그리고 잘 찍어야 하는 일. 2부가 시작됐다. 나는 지니고 있는 가장 긴 70-200mm 망원 렌즈로 바꿨다. 이 정도면 충분한 거리에서도 신랑 신부를 담을 수 있다. 내셔널지오그라피 사진 기사들이 야생에서 맹수 찍을 때 이렇게 하던데.
신랑 신부가 하객 인사를 시작했다. 모든 과정이 슬로우처럼 느껴졌다. 최대한 숨고, 혹시 그러지 못하는 자세가 나올 때면 최대한 박지수 대리에게 등만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다행히 대리님은 오래 남아있지 않았다. 스타터부터 디저트까지 있는 코스요리였는데, 메인인 스테이크까지만 먹고 자리를 떴다. 일 할 때도 자잘한 일들엔 메일 답장이 없고 초연하더니, 식습관도 저랬구나.
식장을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긴장을 푼 지 1분도 되지 않아, 그녀는 다시 식장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신부가 예식장 데코를 위해 사 둔 꽃을 포장해서 가져갔다. 나는 그 컴백 행위가 혹시 긴가민가한 나를 한 번 더 확인하려고 그랬던가 제 발 저리며 남은 주말을 보냈다.
월요일이 됐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출근했다. 먼저 얘기 꺼내왔을 때를 대비해서 답변도 생각해 두었다. "입사 전에 일했던 업체인데 급하게 땜빵이 나서 한 번 간 거다"라고. 그 정도면 알리바이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걱정을 하면서 동시에 반항심도 든다. 솔직히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직무적 연관성도 전혀 없고, 주말에 내가 쓰는 시간이다. 겸업 금지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을 사유가 없다.
무엇보다 가장 싫은 건 회사 사람들 입방아에 오른다는 점이다. 나는 회사에서 1도 튀고 싶지 않다. 잘나고 싶지도 않고, 못나고 싶지도 않다. 그냥 배경색으로만 있다가 퇴근하고 싶다. 그런데 회사 사람들한테 "청년실격씨 주말마다 사진도 찍는다며, 언제 우리 딸도 한 번 찍어줘"라는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물론 그정도로 무개념인 상사는 없지만.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던 중 대리님과 마주쳤다. "주말 잘 보내셨어요?"라며 스몰토크를 가장해서 떠본다.
그러자, "아 네 결혼식 다녀오고 영화 봤어요, 이번 신작 재밌던데요"라며 천진난만하게 답한다. 아아.. 우리 눈썰미 안 좋은 대리님은 눈치채지 못했나 보다.
꼭 눈썰미 문제는 아니고 아마 상상의 범주 밖 일이어서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거꾸로 생각해서 내가 간 친구 결혼식에서 사진 찍어주는 사람이 내 옆자리 직장 동료일 거라고 생각해 봤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좀 닮은 사람이네"정도로 생각하면 모를까.
이제부턴 안경도 쓰고 가발도 사야 할까. 불법도 아니고 위장 취재도 아닌데. 언제까지 이 겸업 금지가 유효할까. 왜 회사 끝나고 하는 일을 하면서도 눈치를 봐야 하는 걸까. 언젠가 주 6일제 근무에서 주 5일제 근무가 되고, 이제 주 4.5일제 근무 얘기가 나오는 이 시점에, 언젠가는 이 "겸업 금지"라는 것도 조금씩 구시대적인 산물이 되지 않을까. 임금 피크제, 최저임금 등 다양한 노동 아젠다가 있는 와중에 이제는 "겸업 금지"라는 조항도 조금씩 유연하게 적용돼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런 날이 오면 꼭 얼굴 까고 유튜브 개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