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 영락이 이야기
1주일에 두 번 수업, 5년 동안 숙제를 안 해 오적이 없다면 믿겠는가? 5년 동안 숙제를 한 번도 안 해온 학생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다 한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 한 번쯤은 아파서 한 번쯤은 까먹어서 숙제를 놓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라도 약속을 지키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숙제도 대충하는 일이 없었다. 단어 하나를 외워도 한 단어에 속한 여러 가지 뜻을 모두 순서대로 외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하겠지만 누군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다면 말리지도 못한다. 놀라운 것은 그 일을 즐기며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나이에 그렇게 해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이상했다. 어떻게 그렇게 성실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하는지 궁금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물었다. 물론 개인의 성향도 있겠지만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궁금했다, 어쩌다 그렇게 공부에는 철저해졌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공부한 적이 없어요. 학교 끝나면 매일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저녁때가 되어 엄마가 부르면 들어가서 먹고 씻고 잠들었어요. 근데. 5학년 초가 되었는데 친구들이 놀이터에 한 명도 없더라 구요, 모두들 학원으로 가버려서 혼자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심심해서 책을 읽었어요.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어봐야지 하고 책을 읽었어요. 근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한 단어가 다음 단어를 이끌어 주는데 그 하나하나의 단어가 정말 제 머리 속에 쏙쏙 들어오는데 놀이터에서 어떤 놀이보다 재미있더라 구요. 그때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 구요. 글자 읽고 이해하는 책 읽기는 문제가 안됐는데 산수에 분수가 어려운 것 같아서 엄마한테 학원에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수학 학원에 다녔어요’ 남들이 들으면 꿈만 같은 일이다. 학원에도 안 보내고 놀이터에서 놀렸는데 공부할 때가 되어서 자기가 스스로 공부할 테니 가르쳐 달라는 철든 아이를 둔다는 건 전생에 나라를 구한 일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영락이를 처음 본건 그 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지금은 고3이 되었다. 지금까지 단어 책을 5권을 함께 외웠다. 단어는 한번 외웠다고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5권을 3번씩은 확인했다. 해석도 완벽하게 한다. 지문을 정확히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내용을 정리할 줄도 안다. 꼼꼼한 성격으로 수학도 잘하고 과학도 잘 해서 고등학교에 와서 이과에 지원했다. 의료 자원봉사를 하다가 의사가 되길 소망하고 있다. 그 꼼꼼한 성격에 딱 맞는 흉부외과 전문의가 되는 것이 꿈이다. 이 꿈에 걸맞게 학교에서도 전교 2등을 유지하고 있다. 본인도 만족하고 최선을 다 한다고 했다.
지난 3월 문제가 생겼다. 3월 전국 모의고사 영어성적이 3등급이 나온 것이었다. 절대 평가 3등급이면 70점대다. 고1, 2 학년 내신영어, 모의고사 8번 한 번도 1등급을 놓친 적이 없어서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잘 해온 아이라 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가장 큰 원인은 시간이었다. 한 문제를 푸는데 평균 3분이 걸렸다. 게다가 지문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서 선택지를 고를 때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대입하다가 틀렸던 것이다. 너무 꼼꼼해서가 원인이었다.
50분 안에 28문제를 풀어야 하니 문제당 주어진 시간은 1분 30초 정도이다. 선택지에 제시된 정답도 경우에 수를 대입할 만큼 복잡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문제 유형에 맞추어 각각 풀어야 되는 풀이 방식도 익혀야 한다. 하지만 영락이는 이것을 편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편법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꼼꼼함이 습관이 되어 고치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생각하는 것도 습관이라는 것을 이제 알은 듯싶었다. 며칠 동안 소위 말하는 멘붕의 상태를 보내고 다시 시작한 영락이는 공부할 때의 꼼꼼함과 시험 볼 때의 정확한 순발력을 구분하고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한 달 동안 시험 볼 때처럼 초 시계를 1분 30초에 맞추어 시간 흐름의 느낌을 몸에 스며들게 했다. 한 지문에 핵심 단어를 찾고 종합하여 선택지에 정답을 고르는데 까지 1분 30초 내에 해결하는 훈련을 했다.
두 번째 원인이었던 답이 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지 않게 했다. 수능 지문의 한글 해석을 읽어보면 이해가 그리 녹녹하지 않다. 꽤 여러 지문이 난도가 높다. 이럴 때일수록 지문 안에 주어진 반복된 단어를 놓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반복된 단어가 네 개였던 지문이 있다, 그 단어는 ‘nature conservation, wilderness, human intervention, 과 nothing to do였다. 선택지에 해당 단어가 있는 것이 2번과 3번이었다. 2번은 nature conservation과 wilderness였고 3번은 conserving nature와 wilderness였다.
답은 2번이었다.
이처럼 선택지의 단어들은 지문 속 문장에서 한 번씩은 거론된 단어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단어들을 혼동을 주기 위해 배열한다. 위의 경우는 wilderness conservation 이라든지 conservation of human intervention으로 배열한다. 꼼꼼하게 읽어보려면 지문이 아니라 선택지를 더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영락이는 지문은 꼼꼼하게 읽고 선택지에서는 가능한 경우로 생각하느라 시간도 오래 걸렸고 결과도 좋지 않았었던 것이다.
이 모든 문제를 파악한 영락이는 지문에서는 반복 어구를 정확히 찾고 선택지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식으로 문제 풀이 방식을 바꾸고 1분 30초를 인지하는 훈련을 했다. 결국 4월 모의고사에서 98점으로 1등급을 받고 나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 저 감 잡았어요!” 서로 많이 기뻐했다. 6월 모의고사 날이었다. 당일 뉴스에서 언어영역과 수리 영역은 쉬웠던 반면 영어영역은 새로운 유형이 2개나 나와서 학생들의 등급 하락을 보도했다. 하지만 영락이는 여전히 98점의 1등급을 받았다. 왜 100점을 못 받아왔냐고 했더니 “ 너무 완벽하려고 하면 되겠어요? 선생님?” 하며 우스개 소리를 했다. 드디어 자신을 극복하게 되었다. 성실하고 꼼꼼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다. 시험을 보는 상황에서는 생각의 절차를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자신을 극복하는 길이다.
왜 5학년 6학년 엄마에게 수능 보는 고3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지금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이 빨리 흐르고 아이들은 빨리 자란다 라고 이야기해도 피부로 느껴지지도 않을 수 있다.
5~6학년 때 아이들은 이미 많은 습관들이 형성되어 있다. 한번 생긴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특히 생각하는 습관은 더욱 고치기 힘들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 생각하는 습관을 잡아주어야 한다.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많은 부분 생각의 습관에 달려 있다. 바르게 생각하고 실천하도록 좋은 습관을 잡아줄 때가 바로 5,6 학년 때이다.